유배지에 발령난 2015년, '위즈덤하우스' 출판사와 3권의 책을 계약했어요. 당시 저는 드라마 피디로 복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어요.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유배지에서 책을 쓰며 시간을 보내자고 생각했지요. (죄송합니다. 너무 훌륭한 위인을 거론해서... 목표는 거창해야 맛이잖아요?) 회사가 정상화되고 생각보다 빨리 복귀했어요. 그 바람에 매년 1월에 새로운 책을 내는 계획도 조금 수정되었고요.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와 <매일 아침 써봤니?>에 이어 3부작의 최종장을 쓰고 있는데요. 원고를 쓰며 머리를 쥐어뜯는 중입니다. 지난 가을에 단행본 3권 분량에 육박하는 원고를 출판 에이전트에게 보냈다가 퇴짜 맞았어요. '피디님, 이러시면 안 되죠. 쓰고 싶은 걸 마음껏 쓴다고 책이 되는 건 아니라고요.' 애정 어린, 그러나 단호한 피드백에 기가 죽어 얼마 안 남은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원고를 뜯어 고치고 있어요.
일을 하다, 안 풀리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놉니다. 다만 놀 때도 일에 관련한 놀이를 해요. 평소에 만화를 좋아하는 저는, 책 원고를 쓰다 막히면 출판에 관련된 만화를 찾아봅니다. 휴식을 취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동기부여를 얻지요. 그래서 읽은 만화가 <중쇄를 찍자!>와 <중쇄 미정>인데요. <중쇄를 찍자!>는 드라마와 만화를 통해 이미 많이 알려져 있으니 오늘은 <중쇄 미정> (가와사키 쇼헤이 저 / GRIJOA(그리조아)) 이야기를 해볼게요.
출판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중쇄입니다. 중쇄란 말 그대로 책을 중복해서 새로 인쇄하는 일이지요. 책이 잘 나가서 재고가 바닥이 나면 중쇄를 찍는데요. 중쇄를 못 찍으면 중소 출판사는 이익을 내지 못해요. 모든 출판인의 꿈이 중쇄지요. 저 역시 저자로서 가장 반가운 소식 중 하나가 중쇄를 찍는다는 편집자의 문자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작가인 동시에 편집자로 일합니다.
저자와 편집자 양쪽을 겪어보고 느낀 점은 앞으로 '편집'이 정보를 가공하고 내보내는데 갈수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극소수의 천재 작가들이 있고, 많은 독자가 그들의 작품을 기다리는 시대는 이제 오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런 비즈니스 모델에선 중소형 출판사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시대에서 요구되는 것은 '독자가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세상'에 '무명의 새로운 작가'를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다수의 독자를 노리기보다 소수라도 숨은 수요를 찾아내서 예상 밖의 공급을 하는 '편집자'가 미래를 만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한 신념 덕에 편집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소 별난 만화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중쇄 미정> 머리말 중에서)
공짜 영어 교실을 블로그에 연재할 때, 제 마음이 그랬어요. 모든 사람들이 조기 유학이나 해외 어학 연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국내 영어 독학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줄 블로그 독자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요. 블로그에 찾아오신 손님 중에 위즈덤하우스 편집자님이 계셨지요. 그리고 제게 책을 내야 할 이유를 짚어주셨어요. 블로그도 좋지만, 책을 통해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다고요. 박경순 위즈덤하우스 편집장님이 블로그 방명록에 글을 남겨주신 날의 흥분을 잊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블로그나 유튜브가 만들어준 신세계지요. 물론 이런 세상에도 저자를 발굴하고 책을 만드는 건 편집자의 몫입니다. 편집자 없이는 어떤 저자도 세상에 나올 수 없어요.
처음 책을 보고는 '응? <중쇄를 찍자!>의 카피 책인가?' 했어요. 출판계에는 따라쟁이가 많아요. 어떤 책 하나가 히트를 치면, 비슷한 책들이 쏟아져나오거든요. 저자가 <중쇄 미정>을 쓴 이유가 있어요.
<중쇄를 찍자!>를 읽었을 때는 내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한 때였다. 내가 다니는 곳은 만화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만화의 판매 부수에 놀라기도 하고, 저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공감하기도 했다. 3류 편집자인 나로선 배울 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건 대형 출판사 쇼각칸의 논리잖아'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라 출판업계를 초대형 출판사의 시점으로 한정한 만화하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중략)
중소형 출판사의 모습은 어떨까? 거기에서 근무하는 편집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을까? 현재의 출판 불황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무엇을 바꾸려고 할까? 그러한 의문을 깊이 파고들기 위해 소형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다지 우수하지 않은 편집자, 바로 나 같은 편집자를 주인공으로 해서 만화를 그려본 것이다. 수십만 부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출판사이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편집자의 시점으로 출판업계의 실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위의 책 149쪽)
이게 독자가 저자가 되는 과정입니다. 어떤 책을 보면, '그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런데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저자가 됩니다. 이를테면 저는 언어 천재의 외국어 학습법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언어 천재까지 아니라도 누구나 다 적용할 수 있는 학습법은 없을까?' '어려서 외국 생활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영어 회화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모든 독자의 궁극의 꿈은 저자가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도 좋아요. 작가의 꿈을 꾸다, '도대체 출판이 뭐고, 중쇄가 뭐지?' 싶을 때는, 저처럼 만화를 보면 됩니다. ^^
이 책은 예비 저자를 응원하는 책이지만, 편집자들을 위로하는 책이기도 해요.
책표지 뒷장에 나오는 글로 마무리하렵니다.
팔리든 안 팔리든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늘 애쓰는 편집자들을 응원합니다.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20) | 2019.03.07 |
---|---|
좋은 일을 하는 좋은 사람 (13) | 2019.03.04 |
창의성이라는 유령 (13) | 2019.02.27 |
읽을 책을 어떻게 찾는가 (6) | 2019.02.23 |
오보의 역사를 기록하다 (10) | 2019.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