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나의 공간을 찾아서

by 김민식pd 2019. 2. 18.

우면산이나 청계산을 올라 서울시 전경을 보면, 그 빽빽한 아파트 숲의 전경에 새삼 놀랍니다. '아, 서울에 아파트가 저렇게 많은데 내 집 한 채 없구나...' 몇번 집을 사고 팔고 이사를 다녔지만, 지금은 전세에서 살아요. '소유가 뭐 그리 중요하랴, 내 몸 누일 곳만 있으면 되지.' 하고 마음을 비웠는데요. 아내는 옆에서 속이 터져라 합니다.   

87년에 처음 서울에 왔어요. 서울살이의 시작은 입주 과외였어요. 과외를 하는 고교생의 방에서 함께 생활했어요.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도 했고요. 1988년 여름에는 대학 동아리방에서 지냈어요. 동아리방이 있는 학생 회관은 천장이 높은 건물인데요. 나무 합판으로 공간을 나눴어요. 담요랑 이불 한 채, 캐비넷에 넣어두고, 아이들이 집으로 가고 나면, 책상을 이어붙여 잠자리를 만들었어요. 그 시절 잠들기 전에 카세트로 산울림의 노래를 들었는데요. 지금도 산울림의 '회상'이나 '청춘'을 들으면 그 시절 누워서 본 동아리방의 높은 천장이 생각나요.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몰라 : 자립 공존 연대를 위한 실험> (장상미 / 슬로비)라는 책에는 작가의 주거연표가 나옵니다.  저자는 2평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지상을 향해 나아가는데요. 요즘 20대, 30대에게 가장 큰 숙제가 주거 문제지요. '어디서 살 것인가'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거주의 문제가 교육관의 문제로, 다시 인생관의 문제로 확장되거든요.      

저자는 첫 직장생활에서 난관에 부딪힙니다. 학교에서 배운 산업의 원리나 직업 윤리와는 거리가 먼 일들이 잦아 혼란에 빠집니다. 직장에 부정이 너무 많은 거죠.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세상이 원래 다 그래."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대요. 사표를 던지고,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힙니다. 무수한 책들 사이로 몸을 숨기지요. 

인생의 답이 담겨있는 '교과서'를 찾고 싶었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인 대학 생활이 무색하게, 취직에 실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진짜 바라던 공부에 몰입할 수 있게 되었다. 

(66쪽) 

저도 그랬어요. 첫 직장 그만두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았는데요. 하루하루 책 속에서 즐겁게 살았어요. 영업을 다니며 나의 욕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게 참 힘들었거든요. 책을 읽으며 재기를 노렸지요. 물론 90년대 초반이라 가능했어요. 그 시절에는 취업이 쉬웠거든요. 요즘은 그런 재도전이 쉽지 않지요. 인생의 전환기는 언제 찾아올까요?


<일하지 않을 권리>를 쓴 사회학자 데이비드 프레인은 한 사람이 삶을 전환하기 위해 겪는 방황기를 '단절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단절점은 몸에 밴 습관과 신념이 의문 속으로 던져지는 일종의 개인적 위기"로, 크게 세 가지 경로를 거쳐 찾아온다. 일상을 피폐하게 만드는 형편없는 일자리를 경험할 때, 좋은 삶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작은 이상향을 발견했을 때, 사회가 요구하는 직업인의 자세를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을 때. 

(87쪽)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기업체 통역을 나갔어요. 외국인 컨설턴트들이 한국의 직원들과 함께 영업점을 다니며 한국 시장을 시찰하고 또 제언을 해주는 시간이었는데요. 승합차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에도 회의를 하고 통역을 했어요. 외국인 컨설턴트들을 모셔오는 비용이 비싸서 그런지, 쉬는 시간 없이 계속 일을 시키더군요. 통역을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쫓아갑니다. 그래야 언제 말을 끊는지 알 수 있어요. 승합차에서 역방향으로 앉아 이동하는 차 안에서 메모를 하며 통역하다 갑자기 멀미가 났어요. 중간에 차를 세우고 시내 도로가에서 토했어요. 한낮에 술취한 남자처럼 가로수를 붙들고 한참을... 그때 자괴감이 들더군요. 통역은 쉬고 싶을 때 쉴 수 없어요.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쉼없이 머릿속에서 대화 내용을 기억하고 통역합니다. 그 날 이후, 전직을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돈은 적게 받아도 나의 존엄성을 지키며 일하고 싶었어요

장상미 저자는 독서와 공부를 거쳐 더 단단한 사람이 되고요. 세상에 나가 다시 찾은 일은 시민운동입니다. 시민 운동을 하다 공간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합니다.


지금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처한 상황과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적정한 책임을 지고, 서로 연대하거나 대립하는 과정을 거쳐 합의점을 찾아낼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라는 소통 수단과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가 얼마간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시민운동은 이제 시민들을 대신해 앞서 싸우려 들 게 아니라, 이런 공간을 열어주고 유용한 자료를 제공하면서 광장에서든 골방에서든 직접 말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110쪽)

시민운동에 대한 탁월한 제안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책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저자가 만든 공간 <어쩌면사무소> 때문이었어요. <적당히 벌고 잘 살기>(김진선, 슬로비)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가족, 직장, 지역공동체를 대체할 느슨하고 유연한 관계망을 상상하며 만든 공간이 <어쩌면사무소>에요. 카페 형태로 문을 연 뒤 작업장, 잡화점, 책방으로 변신을 거듭하는 공간이지요. 서울에서는 어떤 일을 할 때 제일 걸리는 게 임대료인데요. 언덕위의 가게 터를 구한 후 저자는 이렇게 다짐합니다.


이 소중한 기회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살릴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한가지였다. '이 소중한 기회를 가장 잘 살릴 방법' 따위를 아예 생각지 않는 것. 성공하는 기업들의 습관이나 세상을 바꾼 훌륭한 인물의 업적을 연구할 필요도 없다. 대신 내가 지금 발디딘 땅 위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원치 않는 일을 버리고 원하는 일을 찾아 한 걸음씩 나가보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니 장담할 수 없지만 정 안되면 수업료라 생각하고 훌훌 털면 그만이다. 그러다 뭔가 발견해낸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

(162쪽)


비록 내 이름으로 된 집은 없지만, 소중한 나의 공간은 있어요. 바로 이곳 '공짜로 즐기는 세상' 블로그 홈페이지이지요. 하루하루 살며 만난 재미와 의미를 이곳에 차곡차곡 쟁여둡니다. 블로그를 통해 '좋은 삶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작은 이상향'을 발견했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내가 배우고 즐기는 것을 나눌 수 있는 공간. 언젠가는 이곳이 저의 '어쩌면사무소'가 될 것입니다. 퇴직하면 노후에 독서 모임이나 영어 공부 모임, 놀이 학교를 꾸리고 싶어요. 그때는 이곳이 저의 온라인 사무실이자 사이버 학교가 되겠지요.

책에서 만난 글이 제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기획을 위한 기획은 하지 않고
내 욕구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미래가 아닌 현재를 탐험하는 삶.

저도 블로그를 통해 그런 꿈을 꿉니다. '공짜로 즐기는 세상'에서 자립, 공존, 연대를 꿈꿉니다.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을 책을 어떻게 찾는가  (6) 2019.02.23
오보의 역사를 기록하다  (10) 2019.02.20
독서일기 강연후기  (12) 2019.02.16
삶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  (20) 2019.02.11
힘들 때 필요한 3가지  (15) 2019.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