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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기준

by 김민식pd 2019. 1. 31.

100년전에 태어났다면, 나에게 직업의 선택지는 얼마나 있었을까요? 농경시대에는 직업인의 90퍼센트가 농군이었으니, 저도 농사꾼 아니었을까요? 그 시대의 직업적 고민이란, 밭농사를 할 것이냐, 논농사를 할 것이냐. 소를 기를 것이냐, 돼지를 기를 것이냐. 콩을 심을까, 팥을 심을까... 이런 정도 아니었을까요? 70년대 시골에 살 때는 주위 어른들은 다 농부였어요. 유일하게 다른 직업은 학교 선생님이었고요. 제가 어렸을 때, 주위에 선생님이 장래 희망인 아이들이 많았어요.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학교 교사인지라, 선생님의 삶을 동경한 적은 없어요. 아버지를 보며 직업인으로서 행복하시다고 느낀 적이 없어서... 대신 작가를 동경하게 되었어요. 책을 읽다보니, 책을 통해 만난 대표적 직업인이 작가였거든요. 사람의 욕망은 결국 환경에 의해 결정됩니다.

요즘은 직업 선택의 폭은 넓어졌어요. 아이들은 TV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예능을 봅니다. TV 속 세상에는 화려한 직업이 많아요. 마치 우리가 그걸 다 이룰 수 있는 것 같지요. 내가 보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괴리가 너무 큽니다. 그 괴리에서 좌절감이 찾아오지요. 나날이 자신감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한겨레신문에서 즐겨읽는 칼럼이 있어요. 정신분석가인 이승욱 선생님이 쓰시는 '증상과 정상'입니다. 이번에 새 책 <포기하는 용기> (이승욱 / 북스톤)을 내셨어요. 


'나는 이렇게 힘들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이렇게 괴로울까요?'

많은 이들이 묻습니다. 내 삶을 위해 해야 했으나 미처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사느라 그렇게 힘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 그걸 찾아야 지금의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포기할 것이 있다면 나의 행복을 타인에게서 수혈받아 채우려는 욕구입니다.

우리가 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아마 이것에 대한 포기일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권리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세상이 심어준 욕망을 포기합시다.'

(뒷표지에서)


얼마 전, 어떤 분을 만났는데요. 꿈이 국민 MC라 하시더군요.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국민 MC의 꿈, 쉽지 않아요. 그건 국민이 인정해줘야 하거든요. 나의 행복의 기준을 타인으로 삼지 말아요. 님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정도로만 목표를 삼으세요. 저는 책을 쓰지만, 꿈이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에요. 그냥 작가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많은 독자가 제 책을 선택해주셔야 가능한 꿈이지요. 타인에게 제 운명을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달라요. 내 의지대로, 나의 노력에 따라 이룰 수 있어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글 한 편을 쓴다면 이미 작가거든요. 타인의 기준은 포기하고요. 내가 매일 성취할 수 있는 정도까지가 나의 꿈입니다."


이승욱 선생님은 뉴질랜드 유학 시절, 영어로 심리학을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답니다. 수업 내용을 알아듣기도 어렵고, 영어로 쓰는 과제도 어렵고, 영어로 하는 발표도 힘들고... 공부를 접고 귀국해서 장사를 해야하나 고민했답니다. 그 순간 '이번 학기만 더 견뎌보자'고 결심하고는 매일 밤 108배를 하고 불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부모님이 신실한 신자여서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대요. 딱 100일만 하자고 결심하고 시작한 108배, 무려 3000일간 지속했답니다. 아르바이트에 파트타임 직장일에, 학교 과제를 하고, 수업 교재를 읽으면 하루 일과는 대개 새벽 4시에 끝났대요. 수면도 부족한 상태에서 108배를 했답니다. 너무 힘들어 절을 하다 울기도 하고, 너무 잠이 와서 절을 하다 엎어져서 그대로 잠이 들기도 했고요. 

그때 이후 저 자신에게 자랑스러운 것은 석사나 박사학위가 아닙니다. 3000일 동안 자신과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이 훨씬 뿌듯합니다. 학위는 정말 종이 한 장이더군요. 오히려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새벽 108배의 경험을 통해 저는 스스로를 인정할 건덕지 하나를 마련했습니다. 세상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저 자신이 인정할 건덕지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인정하기 위한 과정은 세상에 알릴 필요도 없고, 타인의 확인도 필요 없는 오로지 스스로에 대한 약속,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을 이행한 약속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정욕구의 메커니즘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포기하는 용기> 66쪽)


스무 살에 영어 문장을 외우며 공부했는데요. 지나고보니 그것도 수련이었어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오로지 나 스스로 한 약속을 매일 조금씩 실천해 가는 것. 영어책 한 권을 외운 후, 나 자신을 인정할 건덕지를 얻었어요. 

기준이 굳이 영어 문장 암송일 필요는 없겠지요. 108배도 좋고요. 30분 걷기 운동도 좋아요. 요즘 저의 수행은 매일 한 편 글쓰기입니다. 글 한 편을 위해,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고, 여행을 합니다. 무엇이 되든 좋아요.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기준 하나 정하고, 그걸 꾸준히 실천하는 것. 그게 세상과 나의 괴리에서 오는 상실감을 극복하고, 나를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요?

분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타인의 기준을 <포기하는 용기>가 필요해요.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기준 하나, 그걸 찾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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