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피디로 일하면서, 다른 감독들의 일기를 훔쳐봅니다. 대중의 취향을 고민하는 이들의 속내가 궁금하거든요. 영화감독 이경미 님이 쓴 책이 있어요.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 아르테). 책이 하도 재미있어, 쿡쿡 웃으며 읽었어요. 감독님은 영화 <미쓰 홍당무>를 만든 계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남몰래 짝사랑하던 유부남이 젊은 여자랑 바람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쓴 이야기가 <미쓰 홍당무>다. 혼자 좋아해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은 차마 품지 못했는데 나도 아는 그 여자랑 그 남자가 어떻게 됐다고 하니 그럼 나는 어떡하지, 속상한 마음으로 내가 나를 가지고, 나를 웃겨서, 내가 위로 받은 영화가 <미쓰 홍당무>다.

사랑을 잃고 직업을 얻은 셈이니, 천만다행이다.

(위의 책 103쪽)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이 여기에 있지요. 인생의 고난도 창작의 영감이 되거든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좋아하던 여자친구를 후배에게 뺏긴 적이 있어요. 나보다 더 잘 생긴 녀석에게 가는 걸 보고 투덜거렸지요. '잘난 것들끼리만 어울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잖아?' <논스톱>을 만들던 시절, 조인성이 박경림을 짝사랑하고, 장나라가 양동근을 몰래 좋아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혼자 신이 났지요. '그래, 사랑이란 이래야 맛이지!' 20대 실연의 상처가 30대에 창작의 열정을 불렀으니 저도 사랑을 잃고 직업을 얻은 셈인가요? 직장생활하던 이경미 감독이 영화의 길로 들어선 계기도 재미있어요.

영화감독을 꿈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지겨운 직장 생활의 작은 이벤트 삼아 영화학교에 입학 원서를 낸 일이 이렇게 됐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영화과를 지원했냐 하면 영화감독을 꿈꾸는 주변 친구들이 거기에 원서를 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오랜 꿈은 연극배우였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그때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는 직장 생활 하면서 그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직장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다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바람나서 결국 이혼했겠지.

더 거슬러 올라가, 만일 고3 때 아빠의 반대만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을 것이다. 신나게 대학 생활을 즐겼겠지. 거기서 남자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러다가 다른 남자 만나고 안 헤어졌는데 또 다른 남자 만나고 그러다가 원래 남자한테 들키니까 나도 나를 모르겠다며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빠졌겠지.

그래서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 창피하다.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절 버렸거든요. 그래서 홧김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해버렸어요. 회사 다니기 너무 싫었는데 좋은 핑계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만 부모님께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였죠. 마치 평생의 꿈이 영화감독인 사람처럼.' 이렇게 대답할 순 없단 말이다.

(105쪽)
 
읽으면서 '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했어요. 저도 드라마 PD나 작가를 꿈꾼 적은 없어요. 하루 15시간씩 영어 공부만 하는 게 지겨워 통역대학원 다니던 어느날 방송사 입사 원서를 냈다가 이렇게 된 거죠. 그때 제가 짝사랑하던 대학원 후배가 학부생 시절 방송반 활동을 했거든요. 같이 방송반 하던 선배나 동기들이 방송사 피디 시험에서 매번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혹시 그 시험에 붙으면 나를 좋게 봐줄까?' 싶었어요. 후배에게 잘 보이려고 지원했고요. 원래 아무 생각 없었기에, 대단한 사명감이 필요한 교양 피디나, 예술가적 자질이 필요할 것 같은 드라마 피디 대신, 그냥 잘 놀면 될 것 같은 예능 피디를 선택했지요. 어쨌든 그 후배의 마음을 얻어 20년째 모시고 살고 있으니, 직업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걸로... 
진로 특강 가서 '왜 피디가 되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21세기는 영상 미디어의 시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남의 말을 옮기는 통역사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피디가 되자는 생각에...'라고 말합니다.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요.' 라고 답할 수는 없잖아요? 

모레는 꼭 고기를 먹어야겠다. 몸이 원한다.
염치도 없는 이놈의 몸뚱아리.

(142쪽)

책을 읽다 빵 터진 대목이 많아요. 드라마 피디는 글을 읽는 사람이고, 영화 감독은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드라마 피디는 숱한 대본을 읽고 그 중 방송으로 만들 대본을 찾습니다. 영화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요. 작업 분량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 같아요. 60분 드라마, 20부작을 연출하려면, 찍고 편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대본을 동시에 쓰는 드라마 피디는 드물어요. 영화는 완결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촬영에 들어갑니다. 이경미 감독의 경우, <미쓰 홍당무> 이후 <비밀은 없다>로 장편 영화 연출로 복귀하는데 8년이 걸렸는데요. (상업영화의 경우, 감독 데뷔작이 은퇴작이 되는 이도 많아요.) 영화 연출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그동안 시나리오를 쓰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걸로 캐스팅을 하고, 투자를 받아야 제작에 들어가거든요.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안 풀릴 때 이경미 감독의 다짐.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위의 책 141쪽)

제가 글을 쓰는 비결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면, 부끄러워 차마 발행을 못 할 것 같은 글도 많아요. 그럼에도 8년째 이걸 매일 할 수 있는 이유. '나는 오늘 불후의 걸작을 쓰는 게 아니다. 매일 쓰고 그중에서 얻어걸리길 바랄 뿐이다.' 라고 마음먹기 때문이죠. 재미있는게요. 회심의 글을 올렸을 때는 반응이 없고, 나름 아쉬운 글이라 생각하고 올렸는데, 독자 반응은 뜨거울 때가 있어요. 그렇기에 글은 일단 발행하고 봐야 해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지요. 이게 죽이는 시나리오인지, 아닌지는 찍어서 개봉하고 관객 반응을 봐야 알 거든요? 그런데 제작비가 수십억이 드니까 그걸 알기가 너무 어렵지요. 영화에 비하면, 블로그는 얼마나 좋아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독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데. 이 맛에 오늘도 저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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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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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9.02.07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근데 신기한게 피디님이 예전에
    블로그에서 소개해주신 ‘보건교사 안은영’ 을
    이경미 감독이 넷플릭스용 영화로 제작한다네요.
    오늘 독서일기 소개도 그렇고
    이경미 감독이 피디님과 연결 고리가 있는거 같아요.

    피디님~~
    매일 올리시는 글이 회심의 글이든 아쉬운 글이든..
    전 피디님 글이 매일 보고 싶고
    기다려지는 글이라는거..... 아시죠? ^^

    그러니 평생 블로그하셔야해요.
    약속해주실꺼죠~~~

  2. 오또기 쭘마 2019.02.07 0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의 새로운 글을 보니 설연휴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온게 실감납니다.

    유쾌하게 사시는 분들을 보면 유쾌바이러스가 저까지
    전염시켜줄때가 있는데 이경미 감독님도 유쾌하신 분 같아요.
    피디님과 이경미감독님의 유쾌함으로 다시 돌아온 일상을
    저도 유쾌하게 맞이해야겠어요

  3. 보리보리 2019.02.07 08: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댓글 맘에 안들어도 발행합니다~^___^
    유튜브도 자고 나면 또 올려야 하니 컨베이어벨트 위에 있는듯 하지만, 이렇게 매일 안하면 성장은 없겠지요.

  4. 루치 신 2019.02.07 08: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출근하는지하철에서 피디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매일 매일 글을 쓴다는게 쉽지 않은데 대단하세요 인생은 우연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내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5. kuaile 2019.02.07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헤헤... 글 읽고 즐거워서 내는 소리~

  6. 꿈트리숲 2019.02.07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감독은 영화의 길만 쭉 걸어온 줄 알았는데,
    이전 직업군이 다양하네요.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영화에 녹여내니 영화의 주제나 스토리도 진부하지않고
    더 다양해지나 봅니다.

    실패한 짝사랑 얘기도, 감독 데뷔 얘기도 영화처럼 극적이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받고 인기 얻을 수 있다는 걸 이경미
    작가님이 보여주시네요.
    흔한 얘기도 영화화하는 감독님과 타인의 얘기를 나의
    상황으로 끌어들여 글을 쓰는 피디님. 두 분다 대단하셔요.^^

    잘돼가? 무엇이든. 네~ 무엇이든 잘되고 있습니다.
    희망사항이에요.ㅎㅎ

  7. 쩍팔리게살지말자 2019.02.07 1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절은 잘 보내셨습니까? 이경미 감독이라는 분을 방구석1열 이라는 방송에서 첨 봤는데, 참으로 귀여우시더군요.ㅎ 오늘도 쓰레기를 쓰겠다라.....문장이나 단어는 달라도 피디님의 꾸준히 뭔가를 써야 한다는 생각과
    같아 보입니다.
    이번 명절이라고 못하고, 또 쓸게 없다고 못하고, 핑계만 댔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 집니다.
    오늘 또 다짐 해 봅니다. 뭐라도 꾸준히 써 보자고.
    글이 너무 와 닿아 부분만 발췌 합니다.
    그리고 피디님 글이라도 매일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겠네요.
    오늘도 좋은 글 읽고 해피 바이러스 받아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8. 모퉁이 2019.02.07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이 50줄에 들어서면서, 정말 글이라는 걸 써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직 한줄 한줄.. 매일 용기를 내 보지만 정말 웬만해야 발행을 하지 .. 라며 망설이고 있는데.. 웬지 올해는 하루하루 도전을 해 보아야 겠어요. 이렇게 댓글로 인사하는 것이 이제, 시작입니다!!

  9. 아리아리짱 2019.02.07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긴 연휴끝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가 살짝 두렵고 피곤하게 느껴졌는데 피디님 블로그 읽으며 에너지 충전하여 일상으로 당당히 go back!
    글쓰는것이 쉽게 느껴지도록 '쓰레기라도 쓰겠어' '불후의 명작이 아니라도 매일 쓰겠어.'
    그말에 엄청 용기를 얻습니다.

  10. 김수정 2019.02.07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다짐하면 매일 쓸 수 있다는 말.
    너무 웃기면서도, 뭔가 부담 없는 결의가 느껴지네요ㅎㅎ
    이경미 감독님의 책 한 번 읽어보고 싶어요.
    그냥 한 번 영화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인생이 바뀐 감독님의 특이한 이력.. 인상적이예요.
    그냥 한 번 해본다.
    잘하겠다는 부담을 가지면 가질 수록 무언가 작당하기가 힘든데.
    한 번 해봐? 하는 가벼운 마음 가짐이 더 많은 일에 도전해볼 수 있도록 하는 시발점이 될 것 같아요.
    오늘도 배워갑니다.^^

  11. 사철나무 2019.02.07 1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살면서 벌어진 일은 다 좋은 거네요. 지나간 일 후회한다고 변하는 건 하나도 없겠죠.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

  12. 새벽부터 횡설수설 2019.02.07 18: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어쨌든 꾸준하게 쓸게요!
    감사합니다. ^^

  13. 춈덕 2019.02.07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매일 쓰면서 얻어 걸리길 희망해보겠습니다ㅎㅎ

  14. 러브엘 2019.02.09 01: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이 소개해주시는 책들 정말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5. littletree 2019.02.09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추천해주신 책들 덕분에 도서관과 서점 들르는 일이 즐거워졌어요👍

  16. 꿈단지 2019.02.10 08: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블로그라면 네이버블로그만 있는줄 알았네요 ..피디님 책읽고 강연도 다 찾아보고, 즐겨찾기 해놓고 들어왔습니다. 글이 너무 재밌고요, 유쾌한 분이신거 같아 너무 좋습니다~팬 됐어요^^

  17. littletree 2019.02.12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의 글보고 도서관에 가서 냉큼 빌려와 읽었어요. 읽고나면 피디님 글을 다시 읽게 돼요. 같은 책을 읽었는데 어쩜 이리 깊이와 표현력이 다른지.. 그래도 이 과정이 참 즐거워요.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독서일기 애독합니다~

  18. 샘이깊은물 2019.02.12 11: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
    “쓰레기를 쓰겠어!”
    최민석 작가도 <꽈배기의 맛>에서 비슷한 심경을 고백하셨어요. 쓰는 것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가짐인 것 같아요.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더 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