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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고난이 창작을 부른다

by 김민식pd 2019. 2. 7.
드라마 피디로 일하면서, 다른 감독들의 일기를 훔쳐봅니다. 대중의 취향을 고민하는 이들의 속내가 궁금하거든요. 영화감독 이경미 님이 쓴 책이 있어요. <잘돼가? 무엇이든> (이경미 / 아르테). 책이 하도 재미있어, 쿡쿡 웃으며 읽었어요. 감독님은 영화 <미쓰 홍당무>를 만든 계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남몰래 짝사랑하던 유부남이 젊은 여자랑 바람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쓴 이야기가 <미쓰 홍당무>다. 혼자 좋아해도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은 차마 품지 못했는데 나도 아는 그 여자랑 그 남자가 어떻게 됐다고 하니 그럼 나는 어떡하지, 속상한 마음으로 내가 나를 가지고, 나를 웃겨서, 내가 위로 받은 영화가 <미쓰 홍당무>다.

사랑을 잃고 직업을 얻은 셈이니, 천만다행이다.

(위의 책 103쪽)

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이 여기에 있지요. 인생의 고난도 창작의 영감이 되거든요. 저는 대학 다닐 때, 좋아하던 여자친구를 후배에게 뺏긴 적이 있어요. 나보다 더 잘 생긴 녀석에게 가는 걸 보고 투덜거렸지요. '잘난 것들끼리만 어울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잖아?' <논스톱>을 만들던 시절, 조인성이 박경림을 짝사랑하고, 장나라가 양동근을 몰래 좋아하는 장면을 찍으면서, 혼자 신이 났지요. '그래, 사랑이란 이래야 맛이지!' 20대 실연의 상처가 30대에 창작의 열정을 불렀으니 저도 사랑을 잃고 직업을 얻은 셈인가요? 직장생활하던 이경미 감독이 영화의 길로 들어선 계기도 재미있어요.

영화감독을 꿈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지겨운 직장 생활의 작은 이벤트 삼아 영화학교에 입학 원서를 낸 일이 이렇게 됐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영화과를 지원했냐 하면 영화감독을 꿈꾸는 주변 친구들이 거기에 원서를 냈기 때문이다. 사실 내 오랜 꿈은 연극배우였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만일 그때 오랫동안 사귀던 남자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는 직장 생활 하면서 그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직장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다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바람나서 결국 이혼했겠지.

더 거슬러 올라가, 만일 고3 때 아빠의 반대만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을 것이다. 신나게 대학 생활을 즐겼겠지. 거기서 남자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러다가 다른 남자 만나고 안 헤어졌는데 또 다른 남자 만나고 그러다가 원래 남자한테 들키니까 나도 나를 모르겠다며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빠졌겠지.

그래서 '어떻게 영화감독이 됐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 창피하다.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가 결혼을 앞두고 절 버렸거든요. 그래서 홧김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해버렸어요. 회사 다니기 너무 싫었는데 좋은 핑계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만 부모님께 일생일대의 연기를 선보였죠. 마치 평생의 꿈이 영화감독인 사람처럼.' 이렇게 대답할 순 없단 말이다.

(105쪽)
 
읽으면서 '아,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구나' 했어요. 저도 드라마 PD나 작가를 꿈꾼 적은 없어요. 하루 15시간씩 영어 공부만 하는 게 지겨워 통역대학원 다니던 어느날 방송사 입사 원서를 냈다가 이렇게 된 거죠. 그때 제가 짝사랑하던 대학원 후배가 학부생 시절 방송반 활동을 했거든요. 같이 방송반 하던 선배나 동기들이 방송사 피디 시험에서 매번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혹시 그 시험에 붙으면 나를 좋게 봐줄까?' 싶었어요. 후배에게 잘 보이려고 지원했고요. 원래 아무 생각 없었기에, 대단한 사명감이 필요한 교양 피디나, 예술가적 자질이 필요할 것 같은 드라마 피디 대신, 그냥 잘 놀면 될 것 같은 예능 피디를 선택했지요. 어쨌든 그 후배의 마음을 얻어 20년째 모시고 살고 있으니, 직업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걸로... 
진로 특강 가서 '왜 피디가 되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21세기는 영상 미디어의 시대가 될 것이라 생각했어요. 남의 말을 옮기는 통역사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피디가 되자는 생각에...'라고 말합니다.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잘 보이려고요.' 라고 답할 수는 없잖아요? 

모레는 꼭 고기를 먹어야겠다. 몸이 원한다.
염치도 없는 이놈의 몸뚱아리.

(142쪽)

책을 읽다 빵 터진 대목이 많아요. 드라마 피디는 글을 읽는 사람이고, 영화 감독은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드라마 피디는 숱한 대본을 읽고 그 중 방송으로 만들 대본을 찾습니다. 영화 감독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요. 작업 분량의 차이가 가져온 결과 같아요. 60분 드라마, 20부작을 연출하려면, 찍고 편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대본을 동시에 쓰는 드라마 피디는 드물어요. 영화는 완결된 시나리오를 가지고 촬영에 들어갑니다. 이경미 감독의 경우, <미쓰 홍당무> 이후 <비밀은 없다>로 장편 영화 연출로 복귀하는데 8년이 걸렸는데요. (상업영화의 경우, 감독 데뷔작이 은퇴작이 되는 이도 많아요.) 영화 연출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그동안 시나리오를 쓰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걸로 캐스팅을 하고, 투자를 받아야 제작에 들어가거든요.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안 풀릴 때 이경미 감독의 다짐.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위의 책 141쪽)

제가 글을 쓰는 비결입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려면, 부끄러워 차마 발행을 못 할 것 같은 글도 많아요. 그럼에도 8년째 이걸 매일 할 수 있는 이유. '나는 오늘 불후의 걸작을 쓰는 게 아니다. 매일 쓰고 그중에서 얻어걸리길 바랄 뿐이다.' 라고 마음먹기 때문이죠. 재미있는게요. 회심의 글을 올렸을 때는 반응이 없고, 나름 아쉬운 글이라 생각하고 올렸는데, 독자 반응은 뜨거울 때가 있어요. 그렇기에 글은 일단 발행하고 봐야 해요.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지요. 이게 죽이는 시나리오인지, 아닌지는 찍어서 개봉하고 관객 반응을 봐야 알 거든요? 그런데 제작비가 수십억이 드니까 그걸 알기가 너무 어렵지요. 영화에 비하면, 블로그는 얼마나 좋아요. 돈 한 푼 안 들이고 독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데. 이 맛에 오늘도 저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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