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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검사내전과 검찰개혁

by 김민식pd 2019. 1. 24.

책을 읽는 습관은 어려서 길렀어요. 고교 시절, 우울할 때마다 무협지를 봤거든요. 특히 김용의 <영웅문>을 좋아했어요. <사조영웅전>의 주인공인 곽정을 볼 때마다 감정이입했지요. 내 비록 지금은 어리바리하고 모자라지만, 언젠가 사부를 만나 가르침을 얻는 순간 나는 절세무공을 지닌 고수가 될 것이다... 뭐 이런 허무맹랑한 꿈을 꿨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런지 몰라요. 자기계발서를 찾아읽으며 고수가 되기를 꿈꾸는 건 여전하니까.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를 쓸 때, 무협지처럼 쓰려고 했어요. 찌질한 시골 촌놈이 독학무공으로 영어 고수가 되는 과정을 유쾌하고 통쾌하게 그리고 싶었어요. 정파 고수의 무립 비급이 아니라 사파 고수의 구음진경 같은 책. 읽고 오랜 시간 혼자 무공을 수련하면 어느 순간 독자를 고수로 만들어주는 그런 책을 쓰고 싶었지요. 필력이 딸려서 잠깐 흉내만 냈는데요. 진짜 고수가 여기있네요. 바로 <검사내전>(김웅 / 부키)을 쓴 김웅 검사님. 검사는 칼이 아니라 붓으로 싸우는 사람입니다. 추상같은 필력의 기소문으로 피고의 양심을 찌르지요. 그런데 이 검사님, 글로 사람 웃기는 재주가 보통 아닙니다. 평검사 시절, 사기사건을 많이 접하는데요. 그러다 초인적 능력을 가진 사람도 봐요.


울버린 김 씨는 불운의 아이콘이자 세상의 불행을 홀로 안고 가는 우주의 속죄양이었다. 어찌나 불행했던지 운전만 하면 여성 운전자가 김 씨의 낡은 프레스토를 들이받았고, 일방통행로에 들어서면 역주행하는 차량이, 교차로에 들어서면 신호위반하는 차량이 반드시 김 씨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러다 보니 그는 불과 몇 년 사이에 40여 회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때마다 김 씨는 극심한 중상을 입었다. 고물 프레스토가 전혀 부서지지 않았음에도 김 씨가 그리 중상을 입은 것을 보면 상대방은 아마 내력을 실어 적의 내장을 파열시킨다는 무당면장을 사용했던 것 같다. 누구나 그런 비급의 무공을 쓰다니, 무서운 세상이다. 

(중략) 세상의 불운이란 불운은 모두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던 김 씨는 대신 초인간적인 자가 치유 능력을 타고났다. 그래서 발등을 찍히고도 하루 만에 완치되어 다시 다른 차에 같은 발등이 찍히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알라후 아크바르!

(중략)

그는 자가 치유 능력뿐 아니라 다른 능력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1+1' 같은 것인데, 바로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을 예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정한 수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개의 보험에 가입했다. 월 보험료를 납부할 능력도 없는 김 씨가 이렇게 많은 보험에 가입했다는 것은 그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그는 연속된 불행과 자가 치유 능력, 그리고 예지력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수억 원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위의 책 40쪽)

 

자해 공갈과 보험 사기꾼을 울버린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부르는 고수의 놀라운 손속! 저자가 진정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은 또 있어요. 조무래기랑 붙기보다, 보스랑 붙는 걸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상대를 향해서도 예리한 필봉을 휘두릅니다. 이를테면 정치인과 조폭을 한 방에 싸잡아 날려버리지요. 


우리나라 정치꾼은 조직폭력배와 유사하다. 혼자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고 늘 떼로 몰려다니는데, 고향이나 출신지에 따라 모이며 주로 검은 차나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 조직의 이름은 주로 모이는 곳이나 오야지가 사는 동네, 그게 아니면 오야지의 이름이나 별칭을 따서 만든다. 하는 일은 주로 모여서 같이 밥을 먹는 것인데, 그래서 그런지 대개 '식구'라고 부른다. 주변에서 계보를 만들어주는데 당사자는 그 계파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나 사실인 경우가 많다. 요즘에는 계파 구분도 모호해져서 '범 ㅇㅇ' 혹은 친 ㅇㅇ'으로 불린다. 이권 앞에서 그나마 의리도 사라진 거다. 그들은 서열이 확실하고 특별히 하는 일은 없지만 벌이는 좋고 세금은 안 낸다. 또 갈등과 분쟁을 사랑하기에 늘 그런 자리에 나타나며 주변 사람들의 염원과 달리 그런 상황을 키우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범죄를 저지르면 늘 자신은 모르는 일이며 아랫사람이 몰래 한 짓이라고 변명하는 것도 조폭과 다를 바 없다. 교도소를 다녀와야 대접을 받고 난동을 부려야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다. 자주는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완력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종교 행사에도 자주 참석하고 영화나 드라마에도 자주 출몰한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국민들은 욕하면서 늘 열심히 본다. 막장드라마 시청률이 높은 것과 유사하다. 

(위의 책 344쪽)


아, 글을 참 맛깔나게 쓰시지요. 책을 재미나게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다 문득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어요. 온갖 사기꾼과 협잡배들과 씨름하며 고생하는 일선 검사도 많은데, 왜 우리는 검찰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요? (유독 저만 그런가요? 2012년 구속 영장 2회 청구의 쓰라린 추억? ^^) 

저는 언론개혁 못지않게 검찰개혁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검찰 개혁은 검찰의 정권 타고 넘기 전략 때문에 쉽지 않다는 한겨레 신문의 기사를 읽었어요. 

검찰의 조직 보호 전략, 공식이 있대요.


첫째, 정권 전반기에는 전 정권 비리 수사에 전력을 다합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쥔 검찰은 ‘가장 잘 드는 칼’입니다. 이렇게 요긴한 검찰을 정권이 개혁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 정권 인사들의 비리와 범죄 혐의는 어떻게 할까요? 차곡차곡 쌓아두기만 합니다.

둘째, 정권 후반기에는 그동안 쌓아두었던 현 정권 인사들의 비리와 범죄에 대한 수사를 시작합니다. 정권은 검찰을 개혁할 수 없습니다. 검찰은 조직을 무사히 보존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bar/877153.html#csidx088ac69ed71fda883530e2e39cee59b 


(한겨레 신문의 이 기사는 곱씹어 읽을 만 합니다. 꼭 원문을 읽어보세요. 이런 기사를 접하면 책 읽을 시간을 아껴 신문을 구독하는 보람을 느껴요. 신문 기사 하나로 사회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거든요.) 

<검사내전>의 프롤로그에서 김웅 검사는 이렇게 씁니다. 

어느 날엔가 나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검찰에 들어온 뒤 이 조직은 늘 추문과 사고에 휩싸였다. 그때마다 뼈를 깎는 각오로 일신하겠다는 발표를 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깎을 뼈도 없는 연체동물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접할 때마다 늘 죄인처럼 지냈지만, 추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왜 싸잡아서 욕을 먹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과일을 먹은 죄 때문에 애꿎은 목수의 아들이 죽어야 했던 것처럼, '검사동일체'란 원칙하에 위에서 사고를 치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모조리 욕을 먹어야 하는 기이한 상황으로 느껴졌다.

( <검사내전> 5쪽)

검사님과 비슷한 기분, 저도 느꼈어요. 대학원 후배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앞둔 어느날, 아내가 그랬어요. "예능 피디랑 결혼한다고 하니까, 다들 걱정하네. 예능 피디들은 바람 피우기 쉽다면서..." 억울했어요. ㅠㅠ 이어지는 아내의 말. "애들이 선배가 바람 피울까봐 걱정이라고 하면 내가 그래. 그 선배 생긴 걸 보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ㅋㅋㅋㅋㅋ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피디 개인의 일탈도 나쁘지만, 언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권력을 취하는 행위가 더 나쁜 게 아닌가? 작은 잘못을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조직이 그릇된 길을 간다면 그걸 막는 것도 구성원으로서 꼭 필요한 노력이 아닌가 하고요. 양심적으로 소신있게 일하는 검사들이 있다는 건 반가운 소식이지요. 이제 그 분들이 조직을 일신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검사라는 조직에 대한 국민의 바람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재미나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글 마무리가 무거워졌군요. 검사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검사내전> 작년 한 해, 이 책이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요. 이제 검찰이라는 조직도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독자로서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고도, 검찰과의 악연 때문에 뒷끝 작렬 해서 부끄럽네요... ^^ 어쩌겠어요.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도 제게는 치유의 과정이니까요. 검찰이 국민에게 안겨준 상처, 잘 치유할 기회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검찰 개혁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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