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로 일하지만, 피디가 되는 법에 대해 배운 적은 없습니다. 예능 피디라는 직업에 흥미가 생겨 어느날 갑자기 MBC에 지원했으니까요. 1997년에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음악 프로그램의 조연출로 일을 시작했는데, 기획, 촬영, 편집 등 방송 실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선배 조연출 꽁무니만 쫓아다녔습니다. 처음 맡은 업무는 제작비 정산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전산화가 되지 않은 시절이라 방송이 나가면 조연출이 일일이 손으로 출연료 청구 내역서를 쓰던 시절이었어요. 무대 한 쪽에서 백댄서들 머리수를 헤아리고, 촬영 나온 스탭들의 근무 시간을 따져 식대가 몇번 나가야 하는지 챙기는 일이었지요. 피디가 되면 무대 위 가수에게 큐사인을 주고 MC들에게 동선을 알려주고 촬영 감독에게 컷을 외치는 폼나는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시작은 행정보조였어요.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 상사에게 배운 건, 고객에는 외부 고객과 내부 고객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외부 고객은 전통적 의미의 고객, 즉 나의 상품을 사주는 사람이고, 내부 고객은 회사 내 회계 담당자, 마케터, 공장 출고 담당자를 포함한 직장 동료지요. 내부 고객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외부 고객 관리, 즉 영업이 쉬워집니다. 회계 처리가 빨라야 대리점 대금 지불이 원활하고, 마케팅 협조가 잘 되야 현장 영업이 쉬워지고, 출고가 제때 이루어져야 유통이 빨라지니까요.

피디에게 외부 고객은 시청자요, 내부 고객은 스태프가 될 것입니다. 외부 고객인 시청자들 눈에 보이는 방송에만 치중하느라 내부 고객인 스태프들의 형편을 몰라라 하기 쉽습니다. 내부 고객(제작진)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외부 고객(시청자)을 잘 모실 수 있는데 말이지요. 조연출 중에서는 촬영하고 편집하고 방송 내보내는 데 바빠서 제작비 정산에 소홀한 경우가 있었어요. 출연료나 인건비 청구가 늦어지는 바람에 스태프들 중에는 카드 대출을 받아 급한 생활비를 메우는 경우도 있었지요.

통역사 시절, 여러 회사나 정부 기관에서 일을 했는데 가장 고마운 고용주는 통역료를 제때 챙겨주는 업체였습니다. 미리 선급을 정산받아 일한 그날 바로 돈을 주는 회사가 있고, 통역을 하고 은행 계좌를 적어주고 나왔는데 몇달이 지나도 입금이 되지 않아 전화로 확인을 해보면 결재가 늦어져서 그렇다고 회계 담당자가 외려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차피 줄 돈이라면 제때 챙겨주면 상대가 더 좋아할텐데 말이지요.

제작비 정산 업무를 맡고 결심했어요. '어차피 줄 돈, 최대한 빨리 주자' 방송이 나가면 바로 다음주에 바우처가 처리되도록 했어요. 심지어 어떨 때는 평소에 짬날 때 미리 청구서를 써놓고, 방송 나가면 최종 수정만하고 바로 회계부로 넘겼어요. 작가나 스태프들 사이에 청구서 빨리 쓰는 조연출로 이름을 날렸죠. 나중에 '뉴논스톱'으로 연출 데뷔할 때, 스태프를 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나름 인기 조연출이었거든요.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프리랜서 통역사로 일하면서 '을'의 입장에서 살아본 것이 직장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어려움을 직접 겪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재능을 사는 고객이라는 자세로 삽니다. 그게 스물 다섯 살에 영업사원으로 일하며 배운 첫 깨달음이었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블로그를 매일 찾아와주시는 단골 손님 여러분께,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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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8.07.12 0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돈 문제... 참 쉽지 않은 부분이죠.
    회사 생활 초창기에 뭣 모르고
    업체와 계약한 계약서만 믿고 일하다
    돈 떼어먹힌 적도 많았었는데...흐흐흐.
    하여간 뭐든지 '갑'과 '을' 은 항상 바뀔 수 있다는
    역지사지 마음으로 살아야할거 같네요..


    피디님의 웃는 사진을 보고 있으니
    오늘 하루 즐거운 일들만 있을거 같네요.

    피디가 되는 법은 안 배우셨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피디가 되는 법은 확실히 배우신건 같아요. ^^
    오늘도 좋은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단골 블로그 대표님 ^^

    오늘도 즐겁고 신나게 촬영하시길 바라며
    믿보연 김민식 피디님 아자! 아자! 파이팅~~~~

    #이별이_떠났다
    #매주_토_20:45
    #본방사수
    #안되면_다시보기_몰아보기


  2. 제경어뭉 2018.07.12 07: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감독님의고객님~~^^ㅋ
    날이 너무더워여ㅠㅠ 더위먹지않게 조심하시고 오늘도 응원합니다~ 화이팅!!!!

  3. littletree 2018.07.12 0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골손님이라는 말이 정겹고 재미있어요^^ 정말 버릴 경험은 없나봐요.. 드라마 단골손님으로 토요일도 찾아갈게요;)

  4. 보리보리 2018.07.12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하핫~ 저의 최애 블로그이심~

  5. 노이빗 2018.07.12 1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피디님 블로그는 큐티 같기도 하고 ^^ 매일미사 같기도 한 신앙인들이 매일 힘을 얻고자, 기원을 담고자 들추어 보고 묵상하는 그런 책 같습니다. 대학생 시절 과외를 하다 보면 과외비를 늘 늦게 주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 과외비로 밥도 사먹고 하는데 말이지요. 지금은 저의 아이들의 레슨비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빨리 빨리...제때에 입금을 놓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저런 핑계로 늦어 지거나 미루는 경우도 가끔 있거든요.) 오늘도 즐거운 영감... 감사한 영감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6. seesun 2018.07.12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이러니 사람들이 좋아할 수 밖에...
    항상 감사합니다. 이런 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7. 안가리마 2018.07.12 15: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감사합니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경험이 싸여
    공감의 폭이 넓어지고 인생이 깊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래전에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역지사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내 니 되보께'와 '니 내 되봐라' 랍니다.
    전자의 마음으로 살아야지
    후자의 마음으로 살면 큰 일난다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8. 꿈트리숲 2018.07.12 1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골 고객 한명 더 입장했습니다~~^^

    예전부터 쭉 생각해오던 거지만
    역시 오늘 글 보고서 또한번 경외감이 듭니다.
    보통 이번 직장은 글렀어, 이직하면
    잘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데, 모든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각각의 경험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신것 같아요. 적극적인 삶의 태도 배워갑니다.^^
    저도 내부고객(가족)과 외부고객(블로그 방문자)에 더 감사하는 하루입니다.

    꿈트리숲=정지영입니다.^^

  9. vivaZzeany 2018.07.19 07: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름 단골이었는데, 요즘 좀 바빠서 뜸했습니다~ ^^

    안 본 글이 쭈-욱 밀려있어서 즐겁습니다!
    천천히 읽어보고 마음공부할께요.

    드라마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한 회, 한 회 아쉬운 마음으로 봅니다. 때론 눈물도 나고...
    뜨거운 날씨지만,
    PD님 스텝분들, 배우분들 모두 건강하게 촬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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