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강연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강연을 통해 저자의 육성을 듣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거든요. CD로 듣던 아티스트의 음악을 라이브 공연으로 즐기는 기분이랄까요? 지난 월요일, MBC 사옥 내에서 사내 연수 특강이 열렸어요.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님의 강연, ‘모멸과 혐오를 넘어서’. 덕분에 드라마를 연출하는 중이지만 업무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강연을 들을 수 있었어요.
요즘 우리 사회에는 갑자기 혐오 표현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가끔 인터넷에 올라오는 혐오표현을 보고 깜짝 놀라는데요, 이건 어떤 사회적 징후일까요? 혐오와 차별의 시작은 편견이랍니다. 강의 중 나온 슬라이드가 인상적이었어요.
편견
바닥엔 편견이 있습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편견을 공유합니다.
혐오표현
편견이 굳어지면 조롱, 위협적 모욕적 폭력적 말이나 행동, 집단 따돌림으로 나타납니다.
차별행위
더 심해지면 고용, 서비스, 교육 등의 영역에서 차별이나 괴롭힘, 배제나 분리가 나타나지요.
증오범죄
아직 한국에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증오범죄가 늘어나고 있어요. 편견에 기초한 폭행이나 협박, 강간, 방화, 테러, 기물 파손 등.
집단학살
혐오가 가져오는 극단적 결과는 집단 학살입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의도적 조직적 말살이지요.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에서 인용)
얼마 전, 저는 조조 영화를 보러 갔어요. 영화 시작 전, 예고편을 보는데 제 뒷자리에 앉은 20대 여성 4명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더군요.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서 한마디 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잠시 생각해봤지요.
‘만약 20대 남자 4명이 똑같은 행동을 한다면, 혼자 영화를 보러 온 50대 중년 덕후인 내가 감히 조용히 하라고 한마디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더라고요. 그냥 조신하게 영화만 봤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참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나도 상대에 따라 행동이 바뀌는 꼰대가 아닌가. 사장의 횡포에는 찍소리 못하고, 도급 회사 영업사원에게만 소리를 지르는 중년의 꼰대. 문득 부끄러워졌어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봐요. 저 사람이 나보다 강자라도 내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까?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하거든요.
김찬호 교수님은 강연 중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은 항상 비교를 하며 삽니다. 2가지 비교를 하지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고, 나와 남을 비교합니다. 고도성장기에는 항상 과거의 나보다 현재의 나가 더 나았어요. 소득이 올라가고 집값이나 재산가치가 올라가니까요. 요즘같은 저성장시대는 그렇지 않아요. 10년전보다 내 삶이 나아졌다고 말하기 힘들어요. 부모 세대의 삶보다 자식 세대의 삶이 나아지기도 쉽지 않고요. 이제 남은 건 남과 나의 비교인데요. SNS를 통해 전시되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다 우울해지고 분노가 쌓이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쌓인 화를 우리는 소비자로서 갑질의 형태로 풀어냅니다. 신분제는 무너졌지만 신분의식은 남아있어요. 외형적으로는 성장했지만 내면은 취약하기에 모욕을 주고 받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신분제가 사라진 시대에 유일하게 신분의식을 느낄 수 있는 때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누릴 때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문득 서글퍼지네요. 우리는 돈을 쓰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 상사와 고객의 갑질을 견디며 돈을 벌고 있으니까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사는 법은 없을까요?
공부가 필요합니다.
새해 들어 MBC에서는 매달 인권감수성 교육을 합니다. 업무시간, 근무지에서 받는 교육, 참 좋네요. 회사에서 하는 인권 감수성 교육만 열심히 들어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구성원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회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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