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PD 스쿨'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2.11.22 웹툰 '미생'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6)
  2. 2012.03.22 팟캐스트라는 이름의 이퀄라이저 (6)
  3. 2011.12.22 놀듯이 배우는 영어~ (7)
  4. 2011.12.20 블로그, 케세라 세라(SERA) (5)
  5. 2011.10.29 드라마는 어디에나 있다. (6)
  6. 2011.10.21 예능 연출론 3 (2)
  7. 2011.10.20 예능연출론 2 (1)
  8. 2011.10.09 드라마 PD의 길 3 (6)
  9. 2011.10.08 드라마 PD의 길 2 (3)
  10. 2011.10.07 독서로 인생을 바꾸는 법 (5)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책을 낸다고 했더니, 아내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글을 올렸다.

 

'남편이 평소 자신의 짠돌이 철학을 담은 책을 낸답니다. 많이들 사 주세요.'

 

나름 '매스미디어 피디가 말하는 소셜미디어로 노는 법'이라고 말해줘도 마님에겐 별로 안 먹힌다. 마님에게 나는 돈 한 푼 쓰지 않고 인생을 거저 먹으려는 짠돌이로 각인되어 있으니까.

 

드라마 피디로 먹고 살지만, 드라마 연출에 대해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 그저 공짜로 배웠을 뿐이다. 특히 드라마 촬영 콘티에 대해서는 만화를 통해 배웠다. 컷 연출에 있어 최고의 교본은 슬램덩크다.

 

 

 

 

오른쪽 페이지

(우측 컷 : 윤대협의 원 풀샷, 서태웅 오버쇼울더) 엉...? 윤대협, 걸어오다 서태웅을 본다.

(좌상단: 윤대협 바스트) 여어...

(좌하단: 서태웅 바스트) 어이... 승부하자 

왼쪽 페이지

(우상단 세로 1: 하늘) 응? (여기서 하늘은 시간 경과, 장소 이동을 보여주는 인서트 컷이다.)

(우상단 세로 2: 길 가에 모여있는 아이들)

(좌상단 가로 1: 아이들 그룹샷) 뭐야, 우리 연습장에서... 우리도 농구하러 왔는데. 근데...

(좌상단 가로 2: 아이들 오버샷으로 시점) 저 사람들 프로 선수인가봐. 바보, 우리 나라에 프로가 어디있냐? 저 두 사람 누가 이길까?

(하단: 서태웅 웨스트샷) 공을 던지는 서태웅 모습

(하단 박스: 골대 타이트샷) 공이 들어가는 모습 인서트

 

잘 찍은 드라마를 보면, 버리는 컷이 없는데, 잘 그린 만화 역시 한 컷 한 컷, 그냥 넘어가는 컷이 없다. 만화에도 영상 문법이 있다는 걸 난 슬램덩크를 보고 배웠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는 풀샷 오버쇼울더로 둘의 위치를 보여주고, 대사와 리액션은 바스트 샷으로 처리한다. 빈 하늘 인서트로 장소 이동을 보여준 후, 길 가에 서 있는 아이들, 아이들의 표정, 아이들의 시점으로 두 사람 모습, 서태웅의 플레이, 골대에 들어가는 공, 이렇게 하나하나 수렴해들어가 작가의 의도대로 독자의 시선을 이끄는 것, 이게 드라마 촬영 공식의 기본이다. 이 한 장만 봐도 드라마 촬영 콘티가 다 들어있다.

 

갑자기 웬 철지난 슬램덩크 얘기냐고? 요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을 즐겨듣는데, 미생의 윤태호 작가와 조명가게의 강풀 작가가 출연했기에 환호를 질렀다. '와우, 이런 대박 게스트 캐스팅이 다 있나!' 두 만화가가 역대 최고의 만화로 꼽은 것이 슬램덩크다. 역시!

 

요즘 만화계 최고의 화제작이 웹툰 '미생'인데, 나는 요즘 창작자의 자세에 대해 '미생'에서 배운다.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뜻의 이 만화는 사실 자칫 '살아날 수 없었던' 아이디어였다. '이끼'의 성공 이후, 윤태호 작가가 바둑을 소재로 한 차기작을 준비중이라고 했을때 다들 말렸단다. 심지어 절친인 강풀 작가도 "형, 바둑 만화는 절대로 안돼. 하지마"라고 극구 반대했다. ''이끼'로 미스터리 스릴러물의 한 획을 그은 작가가 왜 생뚱맞게 바둑 만화를 하겠다는 거지?' 

 

자, 여기서 창작자로서 윤태호 작가의 자세가 돋보인다. 다들 안된다고 하니까 기가 죽는게 아니라 오히려 '곤조' 즉 근성이 살아나더란 것이다. 그래서 혼자 밀고 나가서 선보인게 지금의 미생이다. 역시 창작자는 근성이 살아있어야해!

 

드라마 피디의 기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야한다. 그래야 첫째, 작업이 즐겁고, 둘째, 그 결과에 온전히 책임질 수 있다. 물론 그런 점에서 나는 만화가가 부럽다.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으로 구현하는 것을 모두 혼자 할 수 있으니까. (화실 식구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드라마 피디는 작가, 배우, 스탭, 방송사, 등 책임져야할 식구가 너무 많다. 그냥 '나 좋은 것만 할래.' 라고 이야기하면 웬지 무책임한 분위기? 그래서 나는 만화가 가진 소재의 다양성과 모험적인 시도를 부러워하고 좋아한다. 질투와 애정이 한데 섞인 시선?

 

 

 

올해 초, '미생'의 첫 화를 보고, 윤태호 작가에게 문자를 날렸다. '이 작품은 이끼에 이어 또 하나의 걸작이 될 조짐이 보입니다.'

 

착수 0을 보자. 동네에서 바둑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가 11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7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 7년의 세월을 작가는 바둑 알 하나, 그리고 부모님의 바스트 컷 2장으로 표현해낸다.

 

'7년이 지났다.

입단에 실패했다.

그때야 비로소 주름진 아버지가 보였고,

총기잃은 눈빛의 어머니가 보였다.'

 

첫 화에서 바로 알 수 있다. 바둑이 아니라, 인생을 이야기하는 만화로구나! 작가가 소재에 경도되면 안된다. '이렇게 멋진 바둑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겠어.'가 목표가 아니다. '바둑을 통해 그 속에도 인생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가 제대로 된 기획이다.

 

바둑 하나로 살아온 주인공이 모든 걸 빼앗기고 세상에 나간다. 정규 교육도,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살아온 그가 과연 세상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인생도처 유청산'이라는데 '인생도처 유상수'다. 세상 어디에나 고수가 있어 언제나 연출을 배울 수 있는데, '미생'을 보면 연출론과 더불어 인생도 배울 수 있다. 심지어 공짜로! 

 

앞으로 웹툰으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을 연재할 예정이다. 만화로 배우는 드라마 연출론, 캬아! 좋지 아니한가! 다음 시간에 앞서 피디스쿨 학생 여러분께 숙제를 내드린다.

웹툰 '미생'을 보고 오실 것~ ^^ (이런 숙제 내주는 학교 있으면 나오라 그래. ㅋㅋ)

 

'미생' 착수 0 보기...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er/15097

 

    

위의 슬램덩크 만화는 평소 협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꼭 보여주는 장면이다. 못보신 분들은 아래의 포스트를 참고하실 것.

 

2012/11/15 - [공짜 PD 스쿨] - 협업은 생존을 위한 진화의 마지막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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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예전에 미드를 보며 영어를 공부할 때, '이퀄라이저The Equalizer' 라는 시리즈에 매료된 적이 있다. 그 드라마의 최고 매력은 제목이었다. 이퀄라이저, 누구나 평등하게 만드는 사람.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설 탐정이다. 그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다. 법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 그러나 이퀄라이저의 주인공은 의뢰인을 가리지 않는다. 의뢰인이 누구든 공평하게 정의를 수행한다. 부자고 거지고, 상류층이고 하류층이고, 권력이 있고 없고,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총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니까. 



만인을 평등하게 하는 것, equalizer를 구글에 검색하면, gun 총이나 education 교육이 함께 뜬다. 총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 목숨은 누구나 하나 뿐이니까. 교육 역시 그래야한다. 누구나 교육 앞에서는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과도한 사교육이 판을 치는 한국에서 교육 서비스의 보편성은 조금씩 퇴색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 부의 대물림 수단이 되는 것이다. 양극화가 고착화되는 사회, 조선시대 신분처럼 부가 세습되는 사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한국 사회에 가장 큰 복은 총이 없다는 것이고, 가장 큰 우려는 교육의 양극화다. 

희망이 있다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이퀄라이저가 떴다는 점이다. 바로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 그중에서도 팟캐스트는 전문가의 영역에 있던 방송을 보편화시킨 일등공신이다. 

영화를 즐기는 3단계? 즐기고, 비평하고, 만드는 것이다. 드라마 팬의 3단계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를 열심히 보다보면, 재미있는 것과 재미없는 것을 가리는 안목이 생기고,  재미있는 것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즐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평을 하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영화 비평, 신상품 리뷰 등등. 하지만 블로그 덕에 비평은 보편화되었다. 전문 평론가 뺨치는 실력으로 리뷰를 생산하는 블로거가 많다. 신문의 맛집 기행이 한때 최고의 권위를 자랑했으나, 요즘은 파워블로거에게 밀린다. 블로그는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비평을 보편화시킨 도구다.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방송을 만드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팟캐스트와 유튜브의 등장으로 이제는 미디어의 생산도 보편화되었다.

얼마전 27살의 신인 감독 조쉬 트랭크가 감독한 '크로니클'을 재밌게 봤다. '어디서 이렇게 어린 천재가 나왔을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그는 유튜브에 자작 단편을 올리며 영화 제작의 노하우를 익혀왔다. (영화 '크로니클'은 유튜브 세대의 '아키라'다. 초능력을 꿈꾸는 덕후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꼼수다'의 김어준의 놀라운 진행 솜씨를 보면서 그가 어떻게 저런 놀라운 내공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한다. 그는 자신이 말하듯 언론사 총수다. 딴지일보라는 자신만의 미디어를 오랜 세월 만들어왔다. 공중파에서 MC 경력이 없어도 그는 이미 오랜 세월 인터뷰어로 활동해왔고, '나는 꼼수다' 이전에도 팟캐스트 '김어준의 뉴욕 타임스'를 진행해왔다.

방송사에 입사해야만 방송을 만들 수 있는 시대,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오히려 취미삼아 방송을 만들다, 명성을 얻게 되어 방송사에 입사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팟캐스트, 전문가의 영역에 있던 방송을 만인에게 보편화시키는 최고의 이퀄라이저다.  

(팟캐스트에 관한 예전 글 하나~)
2011/07/06 - [공짜 PD 스쿨] - 노는 애들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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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간만에 공짜 영어 스쿨~~~

나는 독학으로 영어 공부해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갔다. 다들 날보고 독종이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그냥 열심히 놀다보니 그렇게 된거다. 진짜다. 나는 영어를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았다. 영어 전공이나, 회화 학원, 어학 연수, 이런거 단 한번도 안해봤다. 그냥 영문 소설 읽고, 팝송 가사 외우고, 시트콤을 열심히 봤다.

소설을 많이 읽었다. 대학교 3학년 때 스티븐 킹에 빠졌는데, 당시에는 킹 소설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용산 미군 부대 옆 헌책방에 가서 페이퍼백을 권당 천원에 사서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만 몰입했다. 고교 시절, 무협지 읽을 때 야한 대목만 스캔해서 읽듯이, 소설도 재미있는 대목만 골라 흥미 위주로 읽었다. 

팝송도 많이 불렀다. 대학 동아리방에서 늘 기타를 치며,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을 불렀다. 여자 신입회원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영어 가사를 멋지게 외워서 불렀는데, 신입생들은 들어오다가도 기타치고 노래하는 나를 보면 도로 나가더라... ㅠㅠ 'You light up my life' 'You mean everything to me' 'My girl' 같은 작업용 팝송을 다 외웠는데, 한번도 써먹을 기회가 없었다.  

시트콤도 즐겨봤다. 당시 하숙방에 흑백 중고 티비를 사놓았더니, 옆방 친구들이 와서 자꾸 볼려고해서 AFKN에 고정시켜놓고 로터리식 채널을 뽑아버렸다. 그러고는 매일 AFKN 시트콤만 봤다. 당시 AFKN에서는 청각 장애인용 영어 자막을 지원했다. 자막까지 녹화해서 보면서 안들리는 유머가 들리는 순간까지 수십번씩 반복했다. 그래서 요즘도 극장가면 웃기는 영어 대사는 용케 잘 들린다. 

영문 소설 수백권이 집에 쌓여가고, 팝송 대백과 한 권을 다 외우고, 시트콤 녹화 테잎이 100개에 육박할 무렵... 홀연히 깨달았다. 나, 어느새 영어의 고수가 되었구나. 그리고 무림대회에 나가서 피바람을 일으켰다.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한 내가,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 대회에 나가 2등상을 탄 것이다. 

 
영어, 어렵게 공부하지 마시라. 즐기시라. 영어는 학문이 아니라 언어다. 언어는 이야기를 전달하고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지, 무작정 외우고 이해해야하는 목표가 아니다. 재미난 이야기나 즐거운 노래를 통해 영어를 공부하시라.

무엇이든 즐겁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영어 공부가 즐겁지 않다면, 그냥 하지 마시라. 영어 안해도 된다. 자신이 즐겁게 공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서, 돈 주고 통역사 쓰면 된다. 

만약 즐겁게 공부하는 분야가 하나도 없다면... 그래서 무엇이든 하나 붙잡고 즐겁게 공부해보고 싶다면... 영어를 한번 시도해보시라. 수학이나 물리, 역사, 이런거 다 못해도 영어 하나만 잘하면 밥은 먹고 살 수 있다. 

다같이 도전해보자, 공짜로 영어를 즐기는 세상!
 
ps.
며칠전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을 봤다. 내가 숨겨진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평가하는 '아이언 자이언트'의 브래드 버드 감독이 실사 연출로 데뷔했다. 역시 명불허전, 액션이 압권이었다. 영화를 보면 요원들이 행성으로 암호명을 만들어부르는데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암호명을 가지고 불평을 늘어놓는 대목이 있다. 
“Why do I have to be Pluto, it isn’t even a planet anymore?” 난 왜 명왕성이야? 더 이상 행성도 아니잖아?
“You can be Uranus.” 그럼 넌 천왕성할래?

난 이 대목에서 혼자서 웃음이 빵 터졌다. Uranus는 누군가의 암호명으로 부르기에 참 부적절한 이름이다. 왜? 발음이 Your anus거든... 암호명, 니 똥꼬... "니 똥꼬 나와라, 오바." "여기는 니 똥꼬!" 



이 장면, 참 멋있다. 난 보면서 '역시 브래드 버드!'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일본 애니의 걸작 공각기동대의 첫 장면을 이렇게 써먹다니... 영화판 공각기동대 1탄 첫머리에서 쿠사나기 중령이 사라지는 장면은 위 화면 앵글과 똑같다.


영화의 그 장면을 찾을 수 없어 TV판 포스터를 대신 올린다.

너무 많이 본 남자... 나는 이런 소소한 재미를 찾아내는 데서 전율을 느끼며 산다. 왜? 나는 오타쿠니까. 나이 마흔 다섯에 이렇게 살고 있으니, 어찌 보면 참 한심한 인생이다. 그래도 이런 오타쿠를 피디로 뽑아주고 영화보라고 월급까지 주는 회사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올해 MBC 필기 시험에 '다음 중 뽀로로의 친구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가 나왔단다. 출제위원의 센스에 박수를 치고 싶다. 참 잘 낸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기 중 루피를 보고, 이건 '원피스 주인공이잖아!'하고 답 체크 한 사람들이 많이 낚였을거다.

얘도 루피지만...

얘도 루피다.

물론 이 문제를 보고 화를 낸 수험생도 있을거다... '고시생이 뽀로로 볼 시간이 어딨어?'

미안하지만, 피디 지망생은 고시생이 아니다. 피디는 고시로 뽑는 직업이 아니다. 그냥 세상 모든 것이 재미있어서, 미친듯이 보다가, 어느날 문득, '나도 저런거 한번 만들어봤으면!' 그래서 도전하는 직업이 피디다. 

즐기지 못하면, 영어도 피디도 할 수 없다.
시작은 무엇이든 즐기는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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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공짜 미디어 스쿨 제1강 블로그 수업, 두번째 시간이다. 

정통시사주간지 '시사인'을 즐겨읽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코너는 '아까운 걸작'이라는 출판서평 코너다. 잘 만든 책이지만, 아직은 덜 알려진 숨은 걸작을 찾는 코너... 이 코너를 볼 때마다 가끔 환상에 빠진다. 내 드라마나 시트콤 중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은 작품이 먼 훗 날, '아까운 걸작'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 물론 나만의 공상이다. TV는 동시대성이 강한 콘텐츠이다. 만든 그 순간 팔리지 않으면 영원히 사장되기 쉽다. 

TV PD가 블로그에 빠져 사는 이유? 시대를 뛰어넘는 활자의 힘 때문이다. 지금 네 살난 내 딸이 먼 훗날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다, 우연히 내 블로그를 만나고, 스무살의 민서가 나의 옛글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면... 이 블로그 곳곳에 숨겨놓은 민서의 아기 시절 사진을 통해,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만 있다면... 시공을 초월하는 메시지의 힘, 그것이 블로그를 하는 이유다. 

여러분이 만드는 블로그? 그건 '병 속에 넣은 편지'다. 10년 후의 나에게 보내는 스무살의 편지. '아, 스무살의 나는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았구나. 아, 참 그때 열심히 살았구나. 그 덕에 지금 난 참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구나.' 10년 후, 자신의 블로그를 보며 이렇게 느낄 수만 있다면 그대의 블로그는 성공한 거다. 결국 블로그는 세상을 향한 창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연애편지다.

다시, '아까운 걸작' 코너로 돌아가서... 이번 주에 실린 책은 전하진 님이 지은 '청춘, 너는 미래를 가질 자격이 있다'다. 전하진 님의 'SERA'형 인재론을 소개한 대목에서, '어? 이건 내가 블로그를 하는 자세인데?'하고 무릎을 쳤다.

 

"전하진씨는 20~30대 젊은이에게 스펙을 버리고 SERA형 인재가 되라고 권한다. SERA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Story)'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많은 사람의 '공감(Empathy)'를 얻어내는 동시에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갖추며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성취감(Achievement)'을 느끼는 것이다."

블로그를 만드는 자세도 똑같다. 
1. Story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2. Empathy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
3. Resilience 곤경과 역경을 이겨낸다.
4. Achievement 성취감을 느낀다.

1,2,4번은 알겠는데, 3번은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고작 블로그하는데 웬 역경? 내게는 역경이 있었다. 초기에는 몇시간씩 시간을 투자해서 글을 썼는데, 방문자수가 하루 열명을 넘지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드라마는 망해도 시청률이 5%는 나온다. 망해도 200만명이 보는 드라마를 만드는 내가, 겨우 열명 보라고 이러고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블로그를 계속했다. 왜? 재밌으니까. 아무도 안봐줘도 나만 즐거우면 되니까.

2억원을 들여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시청률 5%라면 쪽팔려서 죽고 싶다. 월급주는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니 고개를 들 낯도 없다. 하지만 이건 돈 한 푼 안들이고 만든 공짜 미디어 아닌가? 돈 안 받고 재미로 만든건데, 스무명이 보면 어떻고, 아무도 안 보면 또 어떤가? 

블로그 초대장을 나눠드리고, 가끔 그 분들이 개설한 블로그에 들어 가 본다. 내가 초대한 분들의 블로그 목록이 관리 메뉴에 있다. 가 보면, 생각보다 빈 집이 많다. 역시 꾸준한 블로그 생활, 쉽지는 않다.

블로그를 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처음에는 남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 즐겨야한다. 
나 자신이 즐거워야 열심히 하게 되고, 그래야 보람도 생기고, 나중에 보는 사람도 즐겁다. 

사람들의 공감? 역경을 이겨낸 회복 탄력성? 마지막에 오는 성취감? 이 모든 것보다 스토리가 우선이다. 자신의 스토리를 세상에 알리는 재미, 그걸 느껴야한다.

 
오늘은 전하진 님의 특강을 청해들으며, 수업 마치겠다. 다들 안녕~~~ (민지, 민서도 안녕~~~)
 
"위너의 조건, 세라SERA형 인재"
http://cafe.naver.com/dokchi/1031369

ps. 조중동 종편의 평균 시청률이 0.5%도 안된다. 그럼에도 서로 대박났다고 신문에서 난리다. 예전에 시청률 5%짜리 시트콤 만들고 쪽팔려서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게 부족한건 연출력이 아니라 뻔뻔함이었다. 

(조중동 방송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존경하는 선배도 많고, 사랑하는 동료도 많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조중동 방송에 있다고, 조중동 방송까지 사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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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드라마 PD나 작가가 지녀야 할 자세? '드라마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세상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일상의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며칠전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본 영화들이다. '비우티풀'은 강력한 서사와 후반부에 충격적 반전이 쏟아지는 영화다. '라이프 인 어 데이'는 어느 날 하루,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찍어 유튜브에 공유한 것을 편집한 영화다. '라이프 인 어 데이'를 보면, 드라마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일상을 걸러낸 것이란 생각이 든다. 

흔히들 창의성은 천재들의 전유물로, 기발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위의 일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걸러낼 수만 있어도 좋은 이야기가 나온다. 

참고로 '라이프 인 어 데이'는 2010년 7월 24일 하루 동안 촬영되었다. 왜 하필 7월 24일일까? 마지막 타이틀 배경으로 디지털 시계에 날짜가 뜬다. 24/7... 영어 표현 중에 '매일 매일, 하루 종일'이라는 표현이 있다. 바로 24/7이다. 'I'm thinking of drama, twenty four seven. 매일 종일 드라마 생각만 해.' 전세계인의 일상을 포착하는 하루, 24/7... 정말 기발한 발상이다. 

요즘 박경철님의 '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란 책에 빠져 있다. 외과 의사인 박경철님이 병원에서 만난 인연들 이야기다. 생사가 오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고, 큰 웃음 선사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물론 때론 콧등 시큰해지며 삶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많다. 책을 읽다보면, 문득 궁금할 때가 있다. 아니, 외과 의사의 삶이 이렇게 드라마틱하단 말인가? 거의 메디컬 드라마 저리 가라다. 난 그 분의 의사 생활이 특별히 극적이었다기보다, 그 분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히 섬세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수집자이다. 우리 주위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무신경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고, 한 사람 한 사람 애정을 가지고 관찰할 수도 있다. 좋은 작가는 주위의 재미난 이야기를 수집해서 자신만의 서사로 편집해내는 사람이다. 좋은 연출은 일상의 소소한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디테일을 포착해 이를 그림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PD 공채 볼 때, 작문 소재로 아무리 황당한 주제가 나와도 당황하지 말라. 우리 주위의 작은 경험으로부터 이야기를 끌고 가면 무엇이든 글로 풀 수 있다. 면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원하는 후배는 탁월한 천재가 아니다. 대중의 삶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평범한 사람이다. 절대 겁먹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면접에 응하시라. 

끝으로 공짜 PD 스쿨 학생이 만든 과제작 하나를 여러분께 소개할까한다. 역시 일상의 순간을 잘 포착한 작품이다. 예전에 올린 글 중, '공짜로 영화 감독이 되는 법'과 '5분만에 배우는 영화 촬영 기술'이 있다.
2011/02/07 - [공짜 PD 스쿨] - 공짜로 영화감독이 되는 법
2011/08/15 - [공짜 PD 스쿨] - 5분만에 배우는 영화 촬영 기술!

공짜 PD 스쿨의 열혈 수강생 중 한 사람인 '쏘옹지이' 님이, 이 글을 보고 올레 미디어 스튜디오에서 하는 스마트폰 영화 아카데미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한 제1회 스마트폰 영상제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BIFF 해운대 올레 라운지에서 거행한 시상식에서 당당히 1등상을 수상했다! 이 분은 이제 연출 경력에 이렇게 올리시면 된다. 부산영화제에서 전세계 영화 거장들과 함께 당당히 1등상 수상의 영광을! ^^ 

끝으로 '쏘옹지이' 님이 만든 '가족의 정석'을 올린다. 
여러분도, 어서 세상에 달려나가, 여러분만의 드라마, 여러분만의 영화를 만들어주시기 바란다. 
드라마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출연하는 영화를 공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쏘옹지이님께 감사드린다.
공짜 PD 스쿨, 제1호 우등생으로 선정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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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예능 연출론, 마지막 시간이다. 오늘은 예능 연출의 품성과 덕목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첫 시간에 말한, 예능 PD의 3가지 품성론 (창의성, 열정, 대인관계)이 송창의 선배님에게 배운 것이라면, 오늘 이야기하는 예능 PD의 4가지 역할은 주철환 선배님께 배운 것이다. 예능 PD에게는 4가지 역할이 있다.

1. Entertainer (예능인)

오락 PD는 시청자들을 상대로 놀아주는 직업이다. 무엇이 사람을 웃게 하는지, 무엇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지 알아야 한다. 시청자를 위해 놀이판을 만드는 사람, 예능 PD는 우리 시대의 광대다.

그러기 위해, 예능 PD는 변화무쌍하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한다. 드라마는 장르의 변화가 크지 않지만, 예능 PD는 가요, 코미디, 연예 정보, 시트콤, 버라이어티, 퀴즈 쇼 등의 다양한 포맷을 작업한다. 그러기에 항상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새로운 포맷을 만드는 도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예능 조연출 시절, 나는 프로그램 개편이 있는 개편철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맡았다. 6개월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예능 연출의 가장 큰 복이다.

2. Artist (예술인)

촬영을 할 때 앵글을 보는 것은, 화가가 구도를 잡는 것과 같고,
편집을 할 때 흐름을 보는 것은, 작가가 이야기를 만드는 것과 같고,
자막을 쓸 때 운율을 보는 것은, 시인이 글을 다듬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의 예능 프로그램은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대중 예술이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춤 노래 연기 등의 다양한 예인들을 만나야 그들과 작업을 하니,
결국 예능 PD는 21세기의 종합예술인이다.    

(내게 품성론을 알려주신 주철환 선배는 말그대로 종합예술인이다. PD중 최고의 문장가로서 12권의 책을 냈고, 노래 작곡 실력도 탁월해 싱어 송 라이터로 1집 앨범도 내셨다. OBS 사장과 이화여대 교수까지 역임하신 우리 시대의 대표 PD이자, 최고의 르네상스맨!)
 
3. Journalist (언론인)

공중파를 통해 다수에게 전달되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 우리는 언론인의 사명을 다한다.
공공선에 대한 뚜렷한 주제의식과 투철한 사명감을 갖추어야 한다.
방송을 통해 우리는 재미와 함께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시청자의 행복이 곧 공익이다.

4. Businessman (경영인)

예능 프로듀서는 적은 제작비와 최소의 인원을 투입하여,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최상의 효과를 추구한다. 매주 꼬박 꼬박 방송시간은 닥쳐오므로, 순간 순간 경영자의 입장에서 판단을 내려야한다. MC의 기용과 게스트 섭외, 아이템 선정 등 매주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 예능 연출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오너 경영자가 지녀야 할 주인 의식이다. 월급받는 PD라기보다, 매주 수천만원의 제작비를 집행하는, 한 프로그램의 경영자다.

그리고 조연출 AD, 연출 PD의 시절을 겪은 후, 기획 프로듀서 CP가 되면, 여러 프로그램의 관리자의 길을 가게 된다. MC와 PD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최상의 결과를 추구하는 것이 관리자가 된 예능 연출의 소명이다.

오늘의 예능 연출론은 여기까지... 쓰고보니, 대단한 강의도 아닌데... 하는 자괴감이 든다. 
방송을 전공하고, 경륜이 더 많은 연출에게 예능 연출론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분들은 바빠서 블로그를 운영할 짬이 없을테니, 어쩔 수 없다. 나라도 할 수 밖에...

요즘 강연 기부를 다닌다. 나보다 더 훌륭한 강의를 해주실 분이 많은데...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중요한 건 시간을 내겠다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기부란, 성공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게 아니라, 누구나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성의껏 하는 것이 기부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연출일기도 성공한 연출만이 쓰는 게 아니라, 부족한 사람도 공부하듯이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 바란다.

다음 이 시간에는, 드라마 연출론을 들고 오겠다.
그래도, 예능과 드라마를 동시에 강의 할 수 있는 PD는 대한민국에 몇 명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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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지난 시간에는 예능의 간략한 변천사와 버라이어티 쇼의 종류에 대해 살펴보았다. 오늘은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5단계에 대해 알아보자. 

1. 기획
- 편성 시간 확인
- 시간대 시청자 인구 분포 및 동향 파악
- 포맷 및 컨셉, 출연진 구상

예능 프로그램은 시청자 행태 변화에 민감하다. 메인 드라마는 지난 수십년간 저녁 10시 편성에서 바뀐 적이 없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방송중에도 시간대를 옮기기도 한다. 2000년대 초, 방송 3사 저녁 7시대를 장악했던 청춘 시트콤이 지금은 사라진 이유? 시청자 트렌드 변화 때문이다. 10년전에는 저녁 7시, 학교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앞에서 저녁 먹던 청소년들이 어느 순간, 시청율표에서 사라져버렸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직행하고, 밤 12시에 돌아와 다운로드로 시트콤을 시청하는 것이다. 결국 저녁 7시대 청소년 대상 시트콤이 폐지되고, 저녁 8시대 주부 대상 시트콤이 신설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연출자는, 항상 방송시간과 시간대 메인 시청층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또는 역으로, 아이템을 먼저 기획한 경우라면, 시장분석을 통해, 주시청층이 많은 시간대를 잡아야 한다. 

물론 시청자들의 성향 분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연출자 자신의 성향이다. 기획하는 이가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템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다. '나한테는 재미없는데, 사람들은 재미있겠지...' 망상이다. 만드는 사람이 흥이 나지 않는데, 잘되는 예능 프로그램 없다. 본인이 하고 싶고, 즐겨하는 컨셉을 정하라.

예능 기획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하시길.
2011/08/29 - [공짜 PD 스쿨] - PD, HOW? (프로그램 기획안 작성법)
2011/08/30 - [공짜 PD 스쿨] - PD, HOW? 2 (기획안 차별화 전략)


2. 구성
- 프로그램 큐시트 구성
- 방송 시간의 효율적 배분

코너 기획안이 잡히면, 그다음에는 큐시트를 구성한다. 누가 어떤 내용을 촬영하는지 촬영 구성안이다.

일밤에서 '러브하우스'를 연출 할 때, 가장 중요한 고민은 시간 배분이었다. 주인공 가족의 사연 소개, 수리해야 할 집 점검, 공사 장면, 수리한 집 공개... 이 모든 것의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사연 주인공 소개가 너무 길면, 초반에 분위기가 처진다. 그런데 너무 짧으면, 사람들이 주인공 사연에 공감할 수 없어 시청 집중도가 떨어진다. 결국 연출은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고민하는 사람이다.

3. 섭외
- 출연자 섭외 (MC, 패널, 게스트 스타, 사연 주인공 등)

'어려서 글쓰기를 좋아해서 예능 프로그램의 구성 작가가 되었더니, 하루 종일 전화 돌리는 일만 시키더라'는 푸념이 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예능 프로그램 구성 작가의 최대 경쟁력은 문장력보다는 섭외력이다. 드라마는 작가가 써주는 대로 배우가 대사를 하지만, 예능은 어떤 사람을 섭외하느냐가 어떤 글을 쓰느냐보다 더 중요하다.  

MC의 진행 솜씨에 따라 예능 프로그램의 성패가 좌우되니, 섭외 역시 예능 연출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때 무조건 잘나가는 연예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 다양한 사람들의 성향과 장단점을 살펴두어 적재 적소에 출연자를 배치하는 것도 능력이다. '놀러와'에서 다양한 출연자를 독특한 특집으로 매주 엮어내는 것도 연출의 기획력과 섭외력 덕분이다.

4. 촬영
- 야외 촬영과 스튜디오 녹화

포맷의 특징에 따라 어떻게 촬영할지 정해야 한다. 개방된 야외에서 뛰고 구르며 생동감을 살릴 것인지, 스튜디오에서 자기들끼리 수다 떨도록 유도할 것인지, 촬영 방식에 따라 프로그램의 성격은 바뀐다. 예전에는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3대로 녹화하며 부조에서 카메라 커팅하는 방식이 주류였으나, 요즘은 편집 기술이 발달하면서 야외에서 멀티카메라(10대 정도)로 촬영해서 다수의 출연자를 동시에 잡아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5. 편집
- 편집, 자막, 음악 연출

카메라를 1대만 쓰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파이널 컷 프로나 프리미어같은 넌리니어 편집방식이 도입되면서, 10대의 카메라 화면을 동시에 보며 편집한다. 세월이 흘러 기술이 진보할수록, 예능 연출의 작업은 더 노동집약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요즘은 방송사 조연출 중, 예능국의 노동강도가 가장 혹독하다. 물론 예능 대세의 시대라 그만큼 일이 많아진 탓도 있다. 결국 모든 기회는 위기를 동반하고, 모든 고난에는 보상이 뒤따른다. 

시대에 따라 예능 프로그램이 변하듯, 편집 방식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에는 방송국 무대에서 가수와 MC가 서서 노래하고 이야기했다. 이때는 편집이 크게 없었다. 1990년대 들어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막이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연출의 중요한 역할로 등장했다. 무한도전의 김태호PD처럼, 연출자가 쓰는 자막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재미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난 예능 PD는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이라 생각한다. 500년 전 아무리 뛰어난 시인이라도 그의 글을 읽은 당대 사람들은 수백, 수천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조연출이 화면에 자막을 쓰면, 수백만명이 그 글을 읽는다. TV 화면에 글을 입히는 예능 PD는, 우리 시대의 음유시인이다.

방송사 입사 시험에서 작문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잘 쓰는 비결? 많이 읽는 것 말고 다른 비결은 없다. 많이 읽고, 자주 쓰라. 그대가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이상으로 예능 프로그램 제작 5단계를 살펴보았다. 

다음 이시간에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PD의 자질과 품성에 대해 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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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고동선 선배의 연출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조의 여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건 드라마 연출을 공부하는 데 있어 큰 경험이 되었다. 이후 나는 고동선 선배를 통해 김인영 작가를 만났다. 두 사람은 메리 대구 공방전의 연출과 작가로 함께 작업했는데, 김인영 작가가 준비 중인 로맨틱 코미디의 대본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미니시리즈의 메인 연출을 맡게 된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게 된 계기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김인영 작가가 이전에 성공시킨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후속편으로 예전에 미국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를 즐겨 본 내게 욕심나는 대본이었다.

 

장기인 로맨틱 코미디인 만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들어간 작품인데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무엇보다 대진 운이 너무도 나빴던 것이, 첫방송이 나가기도 전에 경쟁사 드라마 추노는 전작인 아이리스의 뒤를 이어 첫 방송에 20%를 넘기고 방송 4회차에 30%를 넘기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방송가에는 사극이 시청률 30%를 넘기면 후발주자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는 속설이 있는데, 직접 겪어보니 실감났다. 그리고 왜 드라마 PD 공모 마지막 질문이 당신은 운이 좋은가?’였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대진 운도 성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판이구나.

 

시청률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도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독려하며 추운 겨울에 밤샘 촬영을 진행하며 드라마 PD의 길은 참으로 가혹하구나.’ 하고 느꼈다. 물론 고통 끝에는 깨달음이 온다. 미니시리즈는 1,2회 내에 성패가 갈리는데, 이야기 전개에 있어 초반 승부를 놓친 건 두고두고 뼈아픈 실수였다.

 

시트콤과 드라마의 차이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시트콤은 캐릭터로 승부하고 드라마는 서사로 승부한다. 즉 시트콤은 어느 정도 방송이 나가고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지면서 더욱 이야기가 재미있어 지는데, 드라마는 무조건 초반에 강한 사건 전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경우 초반에 세 노처녀가 어떻게 골드 미스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캐릭터를 굳히느라 극적인 사건 전개가 약했던 것이 자충수였다.

 

지는 싸움도 즐겁게! 성공에선 자만심만 늘고 패배에선 교훈을 배운다!’는 최대한 긍정적 마인드로 버티긴 했지만 방송이 나가는 내내 무척이나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고 한 달 후, 다시 회사에서 부름을 받았다. 2달 후 촬영 시작하는 50부작 주말 연속극의 연출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 다시 패장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를 외치며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만든 글로리아, 불륜과 이혼과 복수가 난무하는 주말극들 사이에서 차별화된 주말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욕심에서 젊은 층의 감성에 호소하는 트렌디한 이야기로 승부를 걸었는데... 급하게 들어가다 보니 준비가 부족해서 촬영하면서 아쉬움을 많이 느꼈다. 50부작 정도 되는 연속극은 좀 더 오랜 시간 작가와 함께 기획을 하며 이야기에 많은 공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로 옮겨온 후, 3년간 4편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예능과 드라마의 차이? 예능은 팀워크가 강하고 드라마는 독불장군이다. 예능은 연출의 기회가 자주 오지만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기는 쉽지 않고, 드라마는 스타 연출가의 기회는 열려있지만 좋은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자신의 성향에 달려있다. 둘 다 밤새고 고생하는 일이니,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밤을 새야 덜 힘들 것 아닌가?

 

PD WHO & HOW에 글을 쓴 지, 10년이 다되어 가는데, 1권 초판을 꺼내 들고 보니 표지에 MBC 교양국 PD 두 사람이 눈에 띈다. 한학수와 이춘근 PD. 책이 나온 후, 한학수 PDPD수첩 황우석 취재로 PD 저널리즘의 한 획을 그었고, 이춘근 PDPD수첩 광우병 보도로 경찰에 체포되는 영광까지 누렸으니, 홍경수 PD님의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난 지난 10년간 시트콤과 드라마를 오가며 시행착오만 반복해온 것 같다. 세월이 흘러 10년 후, PD WHO & HOW 3권이 나온다면, 그때는 반드시 대박 PD의 길이라는 다소 거만한 제목으로 글을 꼭 써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글을 마친다. 회사에 들어오는 신입 PD들이 책에서 글로 먼저 만난 인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반가웠다. 여러분도 언젠가 현장에서 만날 그 날까지 건승하시길!


(곧 출간될 PD WHO & HOW 2권에 기고한 글입니다. 편집 순서를 보니, 이 글 바로 다음이 곽정환 감독님이 쓴 '추노' 제작기더군요. 아, 정말 민망합니다~^^ 언젠가는 나도 기필코 대박 드라마 제작기를 쓰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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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예능 PD로 10년을 근무한 후, 드라마국에서 실시한 사내공모에 응시했다. 드라마PD로의 직업 전환, 과연 순탄할까?)

입사 10년 만에 면접을 보긴 처음이었는데, ‘어떤 드라마를 연출하고 싶으냐?’ ‘연출의 기회가 예능에 비해 많지는 않을 텐데 괜찮겠느냐?’ ‘드라마에 오면 조연출을 다시 할 각오는 있느냐?’ 등등의 질문이 있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질문이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가?’ 너무 황당해 당황스러웠지만,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었다. 역시 운이 좋은 건가?

 

국을 옮겨 처음 맡은 임무는 시즌드라마 개발이었다. 미니시리즈나 연속극은 이미 기성작가와 스타 PD들이 독식하는 장르로 새내기 연출이나 신인 작가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신인작가나 연출 등용문이었던 단막극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폐지된 상황, 회사에서는 단막극과 연속극의 중간 정도의 형태로 주간단막극을 주문했다.

 

예능국에서 일하다 같이 옮겨 간 노도철 PD (주간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를 성공시킨!)와 함께 기획회의를 하게 되었는데, 노도철 PD가 내놓은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흔히 메디컬 드라마라고 하면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응급실 상황이나 심장외과 등을 다루는데 우리는 가벼운 세태풍자를 겸해서 압구정동의 성형외과를 다루면 어떨까? 그래, 남들이 메디컬 드라마 만들 때, 우리는 메디컬 시트콤을 한번 만들어보자. 시즌드라마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뮤지컬 배우 홍지민 씨를 처음 TV에 캐스팅한 게 나였다. 나중에 홍지민과의 인연에 대해 글을 올리련다.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 배우들과 함께.)

이후 노도철
PD는 본격 메디컬 드라마 종합병원 2’의 연출을 맡았고, 나는 다른 드라마 PD 2명과 함께 비포 앤 애프터를 연출했다. 나름 시트콤의 재미를 드라마에 접목시켜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했는데, 드라마 선배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드라마 국에 왔으면 드라마를 만들어야지, 시트콤을 만들면 쓰나.’

 

또다시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애초에 드라마로 올 때엔 시트콤처럼 가볍고 발랄한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의도였는데, 자칫하면 웃기지도 않고, 울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오겠구나.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드라마, 어떻게 만들 것인가?

 

자아반성 끝에 느낀 점은 시트콤에서 즐겨한 현장 중심의 코미디 연출은 드라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트콤에서는 연출자의 재량에 따라 배우들에게 현장에서 즉흥연기를 끌어내거나 통통 튀는 화면 연출로 예능 특유의 웃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그런 경우 감정선이 툭 툭 튀어서 시청 몰입에 방해받기 쉬웠다.

 

코미디는 대본의 틀 안에서! 연기자의 즉흥 연기나 과도한 연출은 배제하고 작가가 펼쳐놓은 대본의 틀 안에서 놀자! 이렇게 결론 내었다. 이후 나는 재미와 감동이 잘 조화된 대본을 찾아 헤매었다. 그때 예전에 논스톱시리즈에서 연출과 대본으로 만나 10년간 인연을 맺어온 박혜련 작가(역시 드라마로 옮겨 예능과 드라마가 잘 조화된 드림 하이를 집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트콤 경험이 있는 후배 작가가 이번에 드라마 대본을 썼는데 한번 읽어봐 달라고...

 

그렇게 해서 읽어 본 대본이 박지은 작가의 내조의 여왕이었다. 바로 이거야! 난 무릎을 쳤다. 공부는 일등이나, 사회생활은 꼴찌인 남편. 학창시절엔 퀸카, 결혼하고는 무능한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아줌마. 직장 생활을 코믹하게 풍자하면서 부부간의 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드라마. 내가 찾던 대본이 여기 있었구나! 그길로 제작사를 찾아가 연출하고 싶다는 의사도 밝히고, 회사에 연출을 지원했다.

그러나... 드라마 연출 경험이 일천한 내가 들이댄다고 쉽게 기회가 오는 건 아니었다. 로맨틱 코미디 연출 경험이 풍부한 다른 드라마 선배가 작품을 맡게 되었고 난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었으나 다시 용기를 내어 조연출이나 공동연출이라도 시켜달라고 회사에 졸랐다. 그 대본이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어지는지 꼭 보고 배우고 싶었으니까. 자존심, 그까이 꺼! 어차피 드라마를 배우려고 드라마로 옮겼으면 바닥부터 다져야지!


(드라마 PD의 길,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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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1년에 100권을 읽자. 왜? 책 속에 길이 있으니까.
나는 왜 1년에 책 100권을 읽는가? 책 속에 드라마 PD가 되는 길이 있었으니까. 

추천도서 목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독서의 동기부여라 생각한다. 여러분께, 내가 그동안 독서로 인생을 바꾼 경험담을 들려드릴까 한다. 독서로 인생을 바꾼다니, 자기 계발서 얘긴가 싶겠지만, 그렇진 않다. 말 그대로 책을 읽어 인생을 바꾼 이야기다.

어느 공대생이, 책을 읽다, 드라마 PD가 된 거짓말같은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닐 때, 난 늘 미래가 불안했다. 특히 앨빈 토플러의 '미래 충격'을 읽고 더 그랬다.


토플러의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내가 주로 살아가게 될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공대생이었던 나를 뒤흔든 토플러 3부작. '미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 산업혁명이 20세기를 바꾸었다면 정보 혁명은 21세기를 뒤흔들 것이다. 

 

지난 세상을 기준으로 앞날을 계산하는 건 바보짓이다. 당시 나는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이유는? 1970년대와 80년대가 공업 중심 시대였고, 엔지니어가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플러의 책을 읽고 느낀 건, 과거의 기준이 미래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갈 21세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인데,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하며 끙끙거릴 이유가 어딨는가? 공학 전공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또 책 속에 있었다.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를 읽었다. '메가트렌드'는 글로벌 경제의 부상과 그 중요성을 역설한 책이다. 1980년대 말은 아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토마스 프리드만의 역작,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나온건 21세기 초다. 토플러와 나이스비트의 조언을 종합해보니,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자 국제화 시대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 무쌍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어 사용 능력과 국제 감각이 필요했다.

마이클 포터의 '국가 경쟁 우위론'을 읽고, 내가 남과 다른 경쟁 우위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 영어다. 영어를 남보다 더 잘하도록 해보자. 요즘에야 영어가 필수 스펙이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학만 졸업해도 다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언젠가 글로벌 시대가 오면 영어가 필요하리라는 믿음 하에 독학에 매진했다. 왜? 당시에는 유학이나 어학연수는 커녕 해외 여행 자유화도 되기 전이었으니까.

그럼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가 선택한 직장은? 바로 무역상사였다. 마침 1992년 유럽 배낭 여행을 통해 해외 여행의 꿈도 커졌다. 그래, 무역상사맨으로 세계를 주름잡으며 한국의 수출 역군이 되는거야!

인생이 책처럼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미래 트렌드를 읽었다고 자부했건만, 현실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당시 나는 7군데 무역회사에 원서를 넣었다가 7군데 전부 1차 서류 탈락을 당했다. 당연하지, 무역 학과 전공자를 뽑는데 공대생이 응시했으니... 그것도 영어 공부만 하느라 전공 학점은 2.8이었으니...

당시 최고의 무역회사였던 삼성 물산을 찾아갔다. 삼성 물산은 그 해 공채가 없었고 특채만 했다. 삼성본관에 있는 그룹 인력개발본부를 찾아가 그 특채의 기준이 뭐냐고 물어봤다. "관련 전공 성적 우수자나 외국어 특기자입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독학한 영어는 최고 수준이라고 우기며 나를 특채해 달라고 졸랐다. 담당자의 답변.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그렇게 원칙 없이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삼성 본관을 나서며 하늘을 우러보며 장탄식했다. "삼성이 천하의 인재를 잃는구나." (이건 삼국지에 나오는 방통의 대사다.^^ 난 누가 나를 거절하면, 절대 좌절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운이 그 뿐이라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렇게 사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더라.)  

효성물산에 서류 접수했을 때의 수모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기소개서에 독학으로 영어 공부한 내용을 쓰고, 토익 성적서를 첨부했다. 그런데 접수하던 여직원이 자기소개서에 붙어 있던 토익 성적서를 떼어, 내가 보는 앞에서 휴지통에 버렸다. "아니, 그걸 왜 버리시죠?" "지정된 서류 외에는 접수 받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시절에는 입사 전형에서 토익이 제출 서류가 아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당시 토익으로 입사 시험을 보는 몇 안되는 회사 중 하나에 지원했다. 한국 3M이라는 미국계 기업이었다. 필기 시험이 토익이었으니 당연히 응시자 전체에서 토익 성적 1등으로 입사했다.

인생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한국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수출 역군이 되겠다고 영어를 공부했는데, 받아주는 회사가 없어, 결국 미국 제품을 한국에 수입해서 파는 회사의 국내 영업 사원이 된 거다. 

그게 인생이다.
내가 가고 싶어하는 곳에서 나를 받아 주지 않으면,
나를 받아 주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 수 밖에... 

그래도 나는 책에 감사한다.
세계화 시대, 정보화 시대가 온다는 것을 남보다 빨리 알았기에
영어를 남보다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때 익힌 영어는 인생의 위기마다 도움이 되었다.

그럼 어쩌다 PD가 되었냐고? 난 늘 책을 1년에 100권 정도 읽는다. 영업 사원을 하면서도 책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또 다른 인생의 전기가 찾아왔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여기서 언급한 책들은 20년 넘은 책들이다. 지금 읽는건 권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서 예측한 미래는 이미 다 일어난 과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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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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