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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독서로 인생을 바꾼 남자

by 김민식pd 2015. 12. 29.

(2016년을 맞아 독서일기 리부트에 들어갑니다. 목표는 1년에 200권 읽기 기록 갱신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 이유에 대해, 예전에 올린 글입니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닐 때, 난 늘 미래가 불안했다. 특히 앨빈 토플러의 '미래 충격'을 읽고 더 그랬다. 토플러의 책을 읽고 느낀 점은, 내가 주로 살아가게 될 21세기는 20세기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공대생이었던 나를 뒤흔든 토플러 3부작. '미래 충격' '3의 물결' '권력이동'. 산업혁명이 20세기를 바꾸었다면, 정보 혁명은 21세기를 뒤흔들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기준으로, 앞날을 계산하는 건 바보짓이다. 당시 나는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이유는? 1970년대와 80년대가 공업 중심 시대였고, 엔지니어가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플러의 책을 읽고 느낀 건, 과거의 기준이 미래에는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갈 21세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인데,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를 하며 끙끙거릴 이유가 어딨는가? 공학 전공을 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책 속에 있었다.

존 나이스비트의 '메가트렌드'를 읽었다. '메가트렌드'는 글로벌 경제의 부상과 그 중요성을 역설한 책이다. 1980년대 말은 아직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토마스 프리드만의 역작,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가 나온건 21세기 초다. 토플러와 나이스비트의 조언을 종합해보니,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자 국제화 시대가 될 것이었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어 사용 능력과 국제 감각이 필요했다.

마이클 포터의 '국가 경쟁 우위론'을 읽고, 내가 남과 다른 경쟁 우위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 영어다. 영어를 남보다 더 잘하도록 해보자. 요즘에야 영어가 필수 스펙이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학만 졸업해도 다 취업이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언젠가 글로벌 시대가 오면 영어가 필요하리라는 믿음 하에 영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 (여기서 언급한 책들은 20년 넘은 책들이다. 지금 읽는건 권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서 예측한 미래는 이미 다 일어난 과거니까.)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내가 선택한 직장은 무역상사였다. 마침 1992년 유럽 배낭 여행을 다녀와 해외 여행에 대한 꿈이 생겼다. '그래, 무역상사맨으로 세계를 주름잡으며 한국의 수출 역군이 되는거야!' 그렇게 마음 먹었다.

인생이 책 읽듯이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전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명히 미래 트렌드를 읽었다고 자부했건만, 현실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당시 나는 7군데 무역회사에 원서를 넣었다가 7군데 전부 1차 서류 탈락을 당했다. 당연하지, 무역 학과 전공자를 뽑는데 공대생이 응시했으니... 그것도 영어 공부만 하느라 전공 학점은 2.0 대 였으니...

최고의 무역회사라는 '삼성 물산'을 찾아갔다. 삼성 물산은 그 해 공채가 없었고 특채만 했다. 삼성본관에 있는 그룹 인력개발본부를 찾아가 그 특채의 기준이 뭐냐고 물어봤다. "관련 전공 성적 우수자나 외국어 특기자입니다." 전공은 아니지만, 독학한 영어는 최고 수준이라고 우기며 나를 특채해 달라고 졸랐다. 담당자의 답변. "삼성은 구멍가게가 아닙니다. 그렇게 원칙 없이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삼성 본관을 나서며 하늘을 우러보며 장탄식했다. "삼성이 천하의 인재를 잃는구나." (이건 삼국지에 나오는 방통의 대사다.^^ 난 누가 나를 거절하면, 절대 좌절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운이 그 뿐이라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그렇게 사는 게 정신 건강에는 좋더라.)

효성물산에 서류 접수했을 때의 수모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자기소개서에 독학으로 영어 공부한 내용을 쓰고, 토익 성적서를 첨부했다. 그런데 접수하던 여직원이 자기소개서에 붙어 있던 토익 성적서를 떼어, 내가 보는 앞에서 휴지통에 버렸다. "아니, 그걸 왜 버리시죠?" "지정된 서류 외에는 접수 받지 않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시절에는 입사 전형에서 토익성적서가 제출 서류가 아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당시 토익으로 입사 시험을 보는 몇 안되는 회사 중 하나에 지원했다. 한국 3M이라는 미국계 기업이었다. 필기 시험이 토익이었으니 당연히 응시자 전체에서 토익 성적 1등으로 입사했다. 인생이란 이렇게 아이러니하다. 한국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수출 역군이 되겠다고 영어를 공부했는데, 받아주는 회사가 없어, 결국 미국 제품을 한국에 수입해서 파는 회사의 국내 영업 사원이 된 거다.

영업 사원으로 살며, 참 즐거웠다. 무엇보다 인생의 첫 직업을 영업으로 시작했다는 점에, 난 아직도 감사한다. 영업을 통해 세상살이에 대해 많이 배웠다. 어느 직업이든 핵심은 대인관계다. 그런 점에서 세일즈는 대인관계를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고, 가장 기본에서 배울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그 영업사원도 얼마 후 그만두었다. 이유는 또 책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늘 책에 빠져 살았다. 직장인이 되었으니, 직장 생활에서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직장인을 위한 자기계발서를 많이 봤다.

그러다 '종신 고용의 시대가 끝난다'라는, 일본에서 나온 직장인 자기계발서를 읽었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93년 당시, 일본이나 한국이나 종신고용이 대세였다. 첫 직장이 곧 평생 직장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마다 일본의 거품 경제가 곧 꺼지고, 그러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직장인이라고 나와 있었다. 70년대, 80년대의 고도 성장 시기가 끝나면, 경제의 조정 국면이 온다. 이때 여러 기업이 무너질 것인데, 여기서 취약한 것이 회사가 평생 고용을 보장해 줄 줄 알고 직장 안에서 안주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주문한 것이, "직장인이 되지 말고 직업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회사에 목 메고 살면, 그 회사가 문 닫는 순간 밥줄도 잘린다. 그러나 전문 직업인이 되면 언제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되었다. 영업 사원, 분명 재미난 직업이긴 했지만, 전문가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 영업의 최고 자질은 열정이다.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뛰어난 세일즈맨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열정을 가진 청년들에게 언제든지 내 자리를 위협받을 수 있는 게 영업 사원이다. (아무리 열정만 있으면 된다해도, 다단계만은 하지 마시라. 20대에는 가진 게 별로 없는데, 그나마 가장 소중한 자산이 자긍심과 주위의 신뢰다. 두 가지 다 잃는 게, 다단계 영업이다.) 고민 끝에, 영업사원이라는 직장인에서 동시통역사라는 전문 직업인으로의 인생 전환을 꿈꾸게 되었다.

94년 봄, 1년 반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다. 주위에서 다들 말렸다. 몇년이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명예퇴직과 구조조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생 직장이라 여겨왔던 일터에서 쫓겨났다. 고용안정성은 고도 성장기만의 특수한 상황이라 외치던 경영학자들의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순식간에 구조조정의 달인, 잭 웰치의 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마이크 해머의 리엔지니어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한 예견은 1990년대 초반 서점에 가면 온갖 책에 다 나와있었다. 다만 현실이 닥치기 전에는 사람들이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1998년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들이 쓰러지고, 한국 3M역시 구조조정을 겪었다. 내 후임으로 입사한 사원이 회사를 그만두어야 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5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책을 읽어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면, 내 삶도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하나 뿐이다. 책 속에 미래가 있다. 책을 통해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공업 중심의 시대에, 세계화 시대가 온다는 책을 읽고 영어를 공부하고, 종신고용의 시대에, 구조조정의 시대가 온다는 얘기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통역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정말 두려운 책 한 권을 읽게 된다. 이름하여, 제레미 립킨의 '노동의 종말!'

 

19세기 산업 혁명의 여파로, 20세기는 육체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 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 20세기말 정보 혁명은 어떤 세상을 가져다 줄까? 21세기는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기기가 정신 노동을 대신해 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21세기는 인류가 처음으로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소수의 자본가가 산업을 독점하고 대다수 노동자는 노동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가?

내가 96년 여름에 읽은 이 책은 이제와 돌이켜보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미래 예견서이다. 미래라고 하지만, 21세기 들어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취업난을 그대로 예견한 책이다. 갈수록 취업은 어려워질 것이다. 거대한 산업화의 물결, 자동화의 물결은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기 때문에.

책에서 정말 두려웠던 대목은 따로 있다. "10~20년이 지나면 자동 번역 프로그램과 자동 통역기가 나와 통번역사 역시 실직하게 될 것이다." 소사, 소사, 맙소사! 겨우 공부해서 통역대학원에 들어왔더니, 이 직업이 곧 없어진다고?

그럼 과연 21세기에도 살아남을 직업은 무엇일까? 책을 뒤져보니, '미래에도 살아남을 직종은 창작자다. 지식의 2차 유통이나 재생산은 정보화 기기에 의해 대체될 수 있으나, 영상 정보나 미디어의 1차생산자는 컴퓨터가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TV에서 광고가 흘러나왔다. "21세기 영상 문화를 선도할 MBC에서 창조적인 미디어 일꾼을 찾습니다." 그 순간, 나는 통역사에서 PD로 직종을 선회했다.

물론 단순히 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을 바꾸진 않았다.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는 직업보다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영어는 무언가 일을 하는 도구이지, 그 자체만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책에서 읽은 세상의 흐름을 통해, 21세기에는 방송 PD가 각광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게 되었으니, 결국 책 때문에 인생이 바뀐 셈이다.

독서로 인생을 바꾸는 법... 보기보다 단순하지는 않다. 책 한 권을 읽고 인생을 바꾸는 예는 없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어야, 세상의 흐름이 눈에 보인다. 말콤 글래드웰의 3부작, '티핑 포인트' '블링크' '아웃라이어'를 읽어보면, '블링크', 충분한 정보의 양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아웃라이어'는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10만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티핑 포인트'는 어느 임계점에 이르면, 세상은 순식간에 변한다고 말한다.

책 한 권 읽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는다. 많이 읽다보면 세상의 흐름이 보인다. 어느 순간 눈 앞에 미래가 펼쳐진다. 그때는 현실을 박차고 나와 그 미래를 향해 새로운 시도에 나선다. 당연히 실패도 겪게 된다. 책에는 실패에 대한 나름의 치료제가 있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희망의 메시지다. 책이 던지는 위로를 다시 일어나면 된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책들로 베스트셀러 코너는 언제나 만원이니까.

따뜻한 위로라는 백신을 너무 자주 맞으면, 몸이 나른해지고 유약해질 수 있다. 책의 위로는 꼭 필요할 때만 챙기고, 일단은 세상의 가혹한 현실에 자신을 던져야한다. 책은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최고의 친구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도 나를 대신해 인생을 살아주지는 못한다.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몇년 전에 쓴 글을 다시 올린다. 나이 마흔 여덟에 나는, 20대의 나처럼 불안하고 흔들린다. 어떻게 살 것인가. 20대의 나는 책을 읽어 즐겁게 사는 길을 찾아왔다. 마흔 여덟의 나에게도 같은 처방을 한다. 2016년, 한 해 많은 책을 읽고 남은 반평생을 준비하는 걸로. 그에 앞서 스스로 마음을 다지는 의미에서 글을 다시 올린다.  

책 속에 길이 있음을 믿고, 또 한번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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