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년에 100권 넘게 책을 읽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물어본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기준은 없다. 정해진 작가나 장르만 읽는다면 1년에 100권 채우기 힘들다. 나는 아무 책이나 오는데로 다 읽는다.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 '2번 스치면 읽어야 할 운명'이라는 거?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니, 2번 스치면 운명이다.
나는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가 읽고 싶었다. 제목이 너무 와닿아서.(ㅋㅋㅋㅋㅋ) 어느 순간부터 한국이 좀 싫어졌다. 내가 알던 그 나라가 아닌것 같아서. 자발적 망명을 떠나려고, 세 번의 해외 여행을 기획했다. 미국 가기 전에 읽으려고 도서관에 가보니, 대출중. 아르헨티나 가기 전에 가 보니, 또 대출중. 발리 가기 전에 읽으려고 가보니, 여전히 대출중. '한국이 싫어서'가 정말 인기로구나. 나처럼 제목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은 건가?
2015년 12월 26일 아침, 대망의 2016년 독서 기록 갱신을 공언한 후, 경향신문을 펼쳤다. 토요일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과 삶' 섹션이 오는데, 연말 정산으로 '2015 올해의 책과 작가 추천 코너'가 있더라. 거기 보니 장강명 작가가 또 나오는 거다. 기사에 보니 작가의 다른 책도 많더라.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검색해보니 다 대출중인데 딱 한 권 남았다. 그 책이 '열광금지, 에바로드'였다. 이렇게 인연이 두 번 스친 책, 즉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추천이 반복된 책은 읽어주는 게 예의다.
'제목에서 덕후 냄새가 폴폴 나서 그런가? 이렇게 핫한 작가의 작품인데도 대출 안되고 남아있군.' 하면서 책을 빌려왔는데,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거슨 덕후를 위한 경전이 아닌가!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나는 심한 에반게리온 덕후다. 에바덕후가 읽기에 이 책은 정말 대박이더라. 물론 에반게리온을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이 책은 재미날 것이다. 그런데 덕후라면... 책을 읽다가 어느 대목에서 눈물이 막 난다. 회사 출근하는 전철에 앉아 책을 읽는데, 갑자기 코끝이 찡하면서 눈가에 물기가 고이더라. 고개를 들면 '에반게리온' 책 읽다 우는 찌질한 중년의 덕후인 게 들통날 것 같아서 휴지로 코 푸는 척 눈가를 닦았다. 그런데도 흘러넘치는 눈물이 감당이 안 되어서 그냥 고개를 들고 눈물이 주르륵 흐르도록 놔뒀다. '남 눈 신경 쓸게 뭐 있어, 그냥 각자의 인생인데...'
2012년 '에반게리온: Q'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가 '에반게리온 월드 스탬프 랠리'라는 이벤트를 연다. Q 개봉을 앞두고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홍보 부스를 여는데, 에반게리온 등장인물 네 명의 캐릭터 도장을 각각 하나씩 찍어주겠다는 거다. 그 도장을 다 모아 오는게 에바 월드 스탬프 랠리다. 덕후들의 주머니를 후리는데 기막힌 재주를 가진 제작사에서 또 가난한 덕후를 후릴 아이디어를 내놓은 건데, 여기에 진지하게 도전한 청춘들이 있다. 그들은 그 과정을 직접 다큐멘터리로 찍어 영화로 개봉하기까지 한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소설로 각색한 것이다.
어느 대목에서 울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아마 어떤 독자는 '이걸 읽고 왜 울어?' 할 수도 있다. 오히려 혀를 끌끌 차면서 '에반게리온이 뭐라고 이렇게 까지 해?' 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여기서 에반게리온은 중요하지 않다. 열렬히 애정하는 대상은 다른 무엇으로든 대입할 수 있다. 인생을 걸고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 그것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한없이 감동적이었다. 이런 멋진 이야기를 소설로 옮겨준 작가의 재능이 부러울 뿐이다.
여기서 잠깐, '그럼 2016년 독서록에 올릴 책을 2015년 연말에 읽은 거야? 독서량 기록 갱신을 위한 꼼수 아냐?' 하실 분이 있다면... 나는 마음 먹으면, 마음 먹은 그날, 바로 실행에 옮긴다. '방학 되면 독서해야지.' '날 풀리면 운동 해야지.' 이러면 실행하기 힘들다. 예쁜 여자는 눈에 띈 순간, 들이대는 거고, 책을 읽기로 마음을 먹으면 그날 실행에 옮겨야지. ^^
***여기서 잠깐! 다독 비결 1.
나는 보통 대여섯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다. 이 책 저 책 오가다 가장 재미있는 순으로 끝내고, 그 다음 책으로 넘어간다. 책을 다 읽으면 다른 책이 새롭게 독서중 목록에 올라온다. 한 권만 집중해서 읽다가 그 책이 진도가 안 나가면 결국 책을 덮고 다른 일에 한 눈 팔기 쉽다. 소설, 자기계발서, 과학책 등 여러 종류의 책을 동시에 읽다가 재미있는 순으로, 몰입하는 순서대로 책을 끝내는 것이 다독의 비결이다.
***
원래 계획은 12월 26일에 빌려 읽기 시작해서 신년이 되면 마무리하고 독서록에 올리는 거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반나절 만에 다 읽어버린거다. 이런... 이렇게 대박 재미난 책으로 2016년 독서 릴레이의 첫 주자를 끊어야하는데... 얼른 계획을 수정했다. 여전히 이 책을 목록 1로 올리고, 대신 2016년 성탄절까지 릴레이를 마치는 걸로. 그럼 여전히 시간상으로는 1년이니까. 아, 난 역시 잔머리 대왕~ㅋㅋㅋ
책을 보니, 연애 스쿨에서 공유하고 싶은 글도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알려주는 '응시의 기술'.
"그냥 빤히 쳐다보기만 해도 여자들은 다 알아차린단다. 여자들이 그런 데 민감하거든. 괜히 앞에서 폼 잡거나 강한 척 굴 필요가 전혀 없단다."
-67쪽
이 책은 피디 스쿨에서도 공유하고 싶다. 여기 나오는 '에바로드'라는 다큐의 제작 일지는 모든 피디 지망생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례다. 콘텐츠 제작자의 길, 그 첫걸음은 먼저 애호가의 길에서 시작된다. 미친듯이 좋아하는 게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한다.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가 있고, 거기 미쳐있다보니 저절로 만드는 단계로 나아가는 게 맞는 듯.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좋은 모범 사례를 들려준다.
소설을 읽은 후, IPTV 다큐 섹션에서 '에바로드'를 찾아 봤다. 함께 볼만한 영화로는 '잉여들의 히치하이킹'도 있다.
책을 다 읽자마자 교보문고에 들어가 작가의 다른 책들도 다 주문했다. 장강명이라는 이름 석자를 뇌리에 새겨넣는다. 에바덕후인 내게, 장강명의 첫 책으로 '에바로드'가 오다니. 나는 이 작가를 만날 운명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작가를 첫 책으로 만난 걸 보니 2016년도 책 속에서 행복한 한 해가 될 것같다. 앗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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