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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20대의 나에게 주고 싶은 책

by 김민식pd 2015. 12. 23.

(개인 사정상 어제 오늘 영어 스쿨에 새로 올린 글을 내립니다.)

'시사IN'에서 매년 연말 별책부록으로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을 냅니다. 저 역시 매년 챙겨두고 혹시 빠진 책이 있나 살펴보는 애장 부록인데요. 영광스럽게도 올해엔 제게도 원고 청탁이 들어왔네요. 그래서 올해 읽은 책 중에서 한권 골라봤습니다. 은하선 작가의 '이기적 섹스'. 참, 잡지에는 제 소개로 MBC 해직 피디라고 되어있는데요, 아마 제가 장기 배낭 여행 다니는 걸 보고 기자님이 오해하신듯 합니다. 소속은 여전히 MBC입니다. ^^ 이하 기고한 글입니다.

 

 

 

 

책 읽는 습관을 기른 건 어린 시절에 TV를 못 보게 한 부모님 덕분이다. 한창 인기 있던 '육백만불의 사나이'고 '원더우먼'이고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하루는 '브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방송을 시작했는데 다이애나라는 외계인이 쥐 잡아 먹는 장면 때문에 애들이 난리가 났다. 너무 궁금해서 옥상에 올라가 이웃집 거실에 틀어놓은 TV화면을 훔쳐봤다. TV 시청은 금지였지만, 책을 읽는 건 괜찮았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집에 있던 한국 현대 문학 전집을 다 뗐다.

'감자'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을 중학생 때 다 읽었는데, 실은 소설 속 야한 장면을 찾아 읽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하도 야한 장면만 읽고 또 읽었더니, 책이 길이 들어서 펼치면 자동으로 야한 대목이 불쑥 나와서 화들짝 놀란 적도 많다. 야한 장면 덕분에 책이랑 친해졌는데, 최근에 굳이 야한 장면을 찾을 필요가 없는 책을 만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청 야한 책, 은하선의 '이기적 섹스'.

'시사인'의 신간 소개를 보고 샀다가 초반부만 읽고 바로 덮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읽다가는 밤새워 다 읽을 기세였다. 이런 책은 아껴서 읽어야해. 한 달간 남미 배낭 여행을 다니는 중인데, 공항이나 버스 터미널에서 곶감 빼먹듯 아껴 읽었다. 야하면서 동시에 웃기기는 쉽지 않은데, 기내에서 읽다가 웃음이 빵 터져 민망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주위에 한국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봤으면 중년의 변태가 섹스 지침서 읽다가 혼자 난리났다고 흉 볼 거다. ^^

재미있는 자기계발서 읽는 기분이다. 자기계발서란 결국 인생 행복하자고 읽는 책이다. 그 행복이 누구의 기준인가? 재테크 고수에게는 주식 대박이, 헬스 트레이너에게는 빨래판 같은 복근이, 영어 강사에게는 토익 고득점이 행복일 것이다. 재테크를 하고, 몸매를 가꾸고, 영어를 공부해서 취업하는 것도 어찌보면 섹스의 질과 양을 높이자고 하는 일들 아닌가? 정작 목적은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엉뚱한 데 힘을 뺀다. 그냥 섹스를 즐겁게 하면 될 것인데 말이다.

국민행복시대라지만, 모두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좀 더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기 바란다. 삼포세대라고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고 산다는데, 그건 다 포기해도 섹스는 포기하지 말자. 상대가 이성이건 동성이건, 한사람이건 여럿이건, 내 손가락이건 바이브레이터건 상관없다. '이기적 섹스'는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섹스를 찬양한다. 즐겁자고 하는 섹스에 상대가 뭔 상관이람.

좀 더 어려서 이 책을 만나지못한게 한이다.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보면 악당 비프가 과거로 돌아가 젊은 날의 자신에게 스포츠 연감을 준다. 난 20대의 나를 만난다면 이 책을 선물하고 싶다. 아무리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면 뭐하나, 섹스도 즐기지 못하면 말짱 꽝인데. 잘 나가던 한국 중년 남성들이 다 늙어서 섹스 스캔들로 망하는 걸 보고 누가 그랬다. 한창 성욕이 왕성한 10대, 20대에 공부만 하느라 제대로 즐기지 못한 한을 뒤늦게 풀다가 저리 된다고. 이 책을 읽고, 더 어린 나이에, 이성을 더 잘 이해하고, 성욕을 더 잘 해소하기를. 그게 진짜 국민 행복 시대로 가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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