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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2016-2 잠실동 사람들

by 김민식pd 2016. 1. 4.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책을 냈지만, 원래 쓰고 싶었던 책은 따로 있었다. 제목은 '왕따도 즐거운 세상'. 경상도에서 남고를 다닌 나는 고교 시절에 심한 왕따를 당했는데, 당시엔 죽을 것 같이 괴로웠다. 그런데 지나고보니 왕따를 당한 덕에 외로움을 견디는 힘을 길렀고, 그것이 인생을 즐겁게 사는 버팀목이 되더라. 학교 폭력으로 인한 아이들의 자살이 기사화되던 시절에, 그 경험에 대해 책을 한 권 쓰려고 했다. 이 세상 모든 왕따들에게 바치는 응원 메시지를 담아서.

그 책을 끝내 쓰지 못한 건 아내의 반대 때문이다. 아빠가 왕따였다고 소문이 나면 아이들이 놀림을 받지 않겠느냐. "너희 아빠 왕따였다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공포는 정말 못말린다. 아내의 반대에 어쩔 수 없이 책의 방향을 바꿨다. '왕따도 즐거운 세상'에서 '공짜로 즐기는 세상'으로. 운율만 비슷하게 맞췄다. ^^ 언젠가 아이들이 크면 꼭 쓰고 싶다. '왕따도 즐거운 세상.' 나는 지금도 회사에서, 사회에서, 어디서나 자발적 왕따지만, 즐겁게 살고 있다.

'잠실동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책에 나오는 큰 갈등 중 하나가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이다. 엄마는 커뮤니티에서 따돌림 당하기 싫어 모임을 쫓아다니고, 아이는 따돌림 당할까봐 학원을 쫓아다니고, 아빠도 따돌림 당하기 싫어 회식 자리며 골프 모임을 쫓아다닌다.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개인은 과연 행복한 걸까?  

'모든 것은 일상적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 일상이 문제다.'

정말 가슴에 와닿는 진단이다. 일상속에 숨어있는 폭력성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 여기서 잠깐, 다독 비결 2

연말이면 온갖 매체에서 그 해의 추천 도서 목록을 발표한다. 그중 가장 당기는 한권을 먼저 읽어본다. 전문가의 추천이라고 무조건 신뢰할 필요는 없다. 책을 읽는 취향은 제각각이니까. '2015 경향 신문 선정 올해의 책'에 나온 리스트를 들고 도서관에 가서 책들을 검색해보니 '잠실동 사람들'이 대출가능으로 뜨더라. 읽어보니 재미있다. 이렇게 추천목록이 검증되면, 이제 목록에 나온 다른 책에 도전한다. 만약 기자의 판단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다른 리스트를 찾아나선다. '잠실동 사람들'의 경우, 성공이었다. 연말 도서 결산 리스트를 참고하면 연초의 독서가 행복하다.

(아래는 기사 본문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512252000115

*** 

 

책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불리던 대학 교수 남편이 총장의 비리를 고발하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언론에 양심선언을 한다. 다음 학기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고, 해직 교수가 된 남편은 2003년,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사학비리 척결을 외치며 해직 교수 복권을 추진한 덕에 다시 복직된다. 그러나 2008년, 총체적 비리로 물러났던 전임 총장이 정권 교체와 함께 다시 돌아오면서 남편은 다시 해고된다. 실업 초기에는 번역도 하고 강연도 나가던 남편이 일거리가 끊기면서 무기력하게 변해가고, 종내는 집 안에 틀어박혀 책만 보며 누구도 만나지 않는 꽁생원이 된다. 아래는 그 해직 교수의 아내에 대한 심리 묘사다.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고 소리 지르는 남편을 견디며 학교에 나가고 아이를 키우던 그 지난한 나날을 떠올리면 그녀는 지금도 치를 떤다. 주변에서 누가 학생운동을 한다든가 노조를 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혀를 차고 육두문자가 들어간 욕을 한다. 남편의 두 번째 해직 이후, '대의'를 앞세워 가족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하고 모순된 사람이라는 것이 그녀의 세계관이 되었다.'

잘 쓴 소설은 이렇게 사람의 폐부 깊숙이 찔러온다. 조직 속에서 개인의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언제부터 이렇게 힘들어졌을까?

 

책 끝머리에 나오는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은 <모던 하트>를 쓰면서 생겨난 부산물 같은 이야기입니다. 사회적 층위가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 문득 이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궁금해졌고, 사회적 층위를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가 교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던 하트>를 출간하자마자, 교육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교육 관련 일에 종사하시는 분들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교육이라는 키워드를 따라가다 보니 많은 분야와 만나게 되더군요. 정치, 경제, 역사, 지리, 건축 같은 학문의 전반적인 분야가 모두 교육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습니다.

-중략-

소설을 쓰기 전엔 교육이 바뀌어야 나라가 바뀌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쓰면서는 나라가 바뀌어야 교육이 바뀌겠구나, 생각했지요. 소설을 마칠 때쯤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참으로 어리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먼산을 보는 일이 많았다.

끝없이 고민이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 주거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등의 모든 이슈가 교육이라는 거대한 싱크홀 속으로 빨려들어 가 버리는 느낌이다. 답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질문을 멈출 순 없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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