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 책읽기를 좋아해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글쓰는 직업은 배곯기 딱 좋다며 무조건 의대 진학을 고집하셨다. 적성도 안 맞고 성적도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는데, 성적이 오르지 않아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내신등급은 15등급 중 7등급, 고3 1학기 중간 고사 성적이 50명 중에서 22등이었다. 아버지는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동기부여가 덜 된 탓이라며 매를 드셨다. '이게 다 네가 잘되라고 하는 거다. 어른 되면 알 거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렇게 살다가 맞아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내 성적으로는 집 근처 지방대학에 입학해야 했는데, 대학 시절을 아버지와 보내는 것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서울 입성을 목표로 죽을둥 살둥 공부했다. 학력고사 성적이 기적적으로 나와 50명 중 2등을 했다. 학교에는 '김민식이 컨닝했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 성적으로 겨우겨우 한양대 자원공학과로 진학했다. 물론 적성이 맞지 않아 대학에서도 여전히 고생했지만 (공업 수학같은 과목은 거의 매번 F를 맞았다.) 그래도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때부터 1년에 200권씩 책 읽기를 습관화 한 덕에 요즘 피디로 먹고 산다.) 영어 공부를 겸해 원서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한때 수백권의 원서 페이퍼백을 모았다. 전공 수업 시간 강의실 뒤편에 앉아 혼자 프레드릭 포사이스나 스티븐 킹의 소설을 봤다. 전공 성적은 바닥이었지만 영어 소설을 많이 읽어 영어 실력이 늘은 덕에 외국계 회사로 취업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치과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영업이란 어디나 힘들지만 치과 영업은 정말 힘들다. 치과에 들어서는 순간 영업사원인게 티가 난다.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치과에 들어서는 사람은 나 밖에 없으니까. 어느날 하루는 평소 잘 만나주지 않던 깐깐한 고객과 어떻게든 말을 터봐야겠다는 생각에 한껏 밝은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가 된통 혼이 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뭐 팔아먹겠다고!" 대기실 수많은 환자와 간호사들 앞에서 욕을 먹는데 정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나이 스물 일곱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어린 시절, 나의 적성은 문과였으니 그 방면으로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저녁에는 입시반 학원을 다녔다. 근무하는 짬짬이 영어 공부를 했는데 회사 동료들은 승진 시험 대비인줄 알았다. 난 이직을 준비한건데. 심지어 회사에서 자기 계발이라고 학원비 지원까지 받았다. 양심에 찔리진 않았냐고? 영업 현장에서 겪는 수치심에 대한 작은 보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을 공부해서 1995년 12월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에 합격했다.

 

통대 합격 소식에 정말 기뻤다. 작가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번역 작가로 일하며 내가 좋아하는 영문 소설을 한국에 소개할 수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사는 아들을 걱정하실 부모님께 합격의 낭보를 알려드리려고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다.

"아버지, 저 통역대학원 합격했어요. 이게 정말 어려운 시험인데요, 한번에 붙었어요."

그러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것 봐라. 너도 마음먹고 공부하면 할 수 있잖아. 그 정신으로 수능을 한번 더 보자. 그래서 한의대를 가는 거야. 한의사는 정년이 없는 직업이니 지금 재수를 해서 마흔에 졸업해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야."

스물 일곱 내 인생에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룬 그 순간, 아버지는 나를 다시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의사가 되지 않는 한, 난 평생 아버지 눈에 부족한 자식일 수 밖에 없구나. 그래서 난 아버지를 포기했다. 아니, 아버지의 기대에 맞추고 사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내가 그 시절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 아이를 키우며 항상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품고 있는 희망이 혹시 아이에게 폭력이 되지는 않는지. 내가 바라는 아버지의 자세는 팬으로 사는 것이다. 아이의 즐거운 삶을 응원하는 팬.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훌리건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팬과 훌리건의 차이? 선수가 매 순간 경기를 즐기기 바라면 팬이고, 무조건 이기기를 바라면 훌리건이다. 선수가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든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성숙한 팬이다.

 

그런데 훌리건처럼 사는 부모도 있다. 아이들의 삶에 난입해서 심판이 불공정했다고 심판 폭행하고, 동료가 패스를 안 해준 탓이라고 아이들 친구 이간시키고 그러기도 한다. 심지어는 경기장에 난입해서 선수를 폭행하는 경우도 있다. "왜 이렇게 밖에 플레이를 못해! 넌 이것보다 더 잘 할 수 있잖아! 열심히만 하면 이길 수 있는데 왜 이 정도로 밖에 못하는 거냐.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그걸 알면 이렇게 나를 실망시키면 안되지."

 

 

 

딸들에게 최고의 팬으로 살고 싶다. 어떤 경기 결과든, 그것이 그들의 최선이라 믿으며 살고 싶다. 팬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열띤 응원이다. 선수가 자신의 경기를 즐기기를 바라는 응원. 인생이라는 경기를 치루며, 아이들이 그 순간 순간을 즐길 수 있기를 진심을 다해 기원하며 사는 것, 그것이 아버지로서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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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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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오문 2013.12.11 09: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pd님...

    다른 일도 많으실텐데 제 댓글에 긴 답을 주시고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도 별로 없으셨구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요.^^

    애들이 점점 커가니 욕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태어났을 땐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였는데

    슬슬 말을 시작하니 똑똑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pd님 말씀처럼 훌리건으로 살지 말고 팬으로 살라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곧 잊어먹을듯)

    오늘 눈이 좀 왔네요 다니실 때 조심하십시오.

    즐겁게 하루 보내시구요.

    고맙습니다.

    권오문 드림.

  2. 열매맺는나무 2013.12.11 2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정말 콕 집어 잘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팬이냐 훌리건이냐.
    저도 아이들과 남편의 팬으로 살려고 늘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의 꿈에 간섭하면 아이들은 자기가 뭘 잘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그렇군요. 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올바른 나침반 노릇을 해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지만, 실은 아이들의 나침반도 망가뜨리고 키까지 잡아 채는 일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팬으로 살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욕심부리지 말자고요. ^^

  3. 두두아빠 2013.12.13 10: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부분의 대한민국 가정에서 pd님과 아버님의 관계는 흔히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저 역시 그랬구요.

    홀리건보다 팬으로 살고싶다는 말 공감이 갑니다.
    저도 제 딸아이의 사생팬이 되어보겠습니다^^;;

  4. 2013.12.17 2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김민식pd 2013.12.18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mbc 최종까지 가셨다면 그 자체로도 대단한 겁니다. 부모님께서 자부심을 가지셔도 좋은 따님이네요. 아니 그보다 스스로에게 더 자부심을 가지세요. 그 정도면 어딜 가도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잉여라 자부하는 님에게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영화를 권해드립니다. ^^ 잉여의 창의성을 꽃피울 날이 곧 올 겁니다. 화이팅!!!

    • 2013.12.18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