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어느 드라마 작가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우린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말할 때 '내리 사랑'이라는 말을 씁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크다고. 과연 그럴까요? 어른의 사랑은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않나요? 우리가 아이를 사랑할 때는 항상 무언가 조건이 붙고 무언가를 대가로 바라죠. 하지만 아기가 어린 시절 부모를 바라 보는 그 눈빛 속의 사랑, 그건 순수와 무조건적인 숭배, 그 자체죠. 저는 평생을 노력해도 부모로서 아이에게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요. 너를 낳고 기르면서 난 평생 정말 행복했단다. 너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너같은 아이를 얻기 바란다. 그래서 내가 받은 이 사랑과 행복을 느껴보기를."

 

나도 어렸을 때 같은 말을 들었는데 상황은 반대였다.

"너도 나중에 크면 꼭 너같은 애 낳기를 바란다. 그래서 너도 한번 똑같이 당해봐라."

작가의 따님과 달리 난 어려서 정말 사고뭉치였나 보다. 난 저 말이 참 싫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며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느낄까? 난 오히려 부모님이 참 가엾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늘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의사 아들을 만들지 못해 평생을 불행하게 사신 분이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느낀 안타까움이 있다. 당신의 인생도 뜻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식의 인생은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랬을까?

 

 

 

드라마 연출로 살며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는 게 내 일이다. 지시는 내릴 수 있지만 반드시 그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는 타이피스트가 아니고 배우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연출의 업무다. 내 뜻대로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괴물이지, 리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시청률을 행복의 척도로 삼지는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드라마를 보느냐, 그걸 내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내 행복은 다른 이에게 휘둘리게 된다. 만드는 그 순간, 과정을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라면 한번 솔직하게 다시 한번 그 괴로움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게 진짜 아이의 문제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이 아이에게 투영된 문제인지. 그리고 제발 함부로 아이를 저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보다 갑절의 인생을 산 어른이 아이와 실랑이 끝에 내뱉는 말이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애 낳아봐라."는 아니지 않는가. 요즘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다. 아이를 기르는 일이 정신적 고통이고 경제적 부담이라고 느끼는 건,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부모의 저주 탓이 아닐까? 부모가 교육과 육아로 늘 괴로워했으면서, 정작 아이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건 모순이다.

 

아버지로서 감히 말하자면 육아는 정말 축복이다. 아이가 태어나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 그 속에 담긴 사랑은 부모가 평생을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다. 

 

 

일산 MBC 드림센터 사무실의 내 책상에는 항상 가족 사진을 붙여놓는다. 일을 하며 항상 나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부딪힌다. 드라마 촬영을 할 때는 집에 사나흘씩 못 들어가고 하루 2시간 자면서 밤샘 촬영을 강행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고 실제로 피디 중에는 과로사하는 이도 있다. 내 경우, '내조의 여왕' 촬영이 끝난 후 체력 저하로 대상포진이 와서 고생한 적도 있다. 

 

몸만 힘든게 아니다. 일을 할 때는 육체적으로 괴롭고 말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정신적으로 괴롭다. '나는 연출로서 무엇이 부족해 회사에서 일을 시키지 않는 걸까?' 연출 17년차, 나는 안다. 시청자는 드라마의 팬이 되기도 하고, 안티가 되기도 한다. 제일 무서운 건 사람들이 외면할 때다.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말해서 드라마국은 피디간의 경쟁 시스템이다. 누군가 실패하면 그건 다른 이에게 기회를 뜻한다. 철저하게 외로운 조직이다. 가족의 사랑이 없다면 버티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내 옆에는 항상 가족 사진이 있다.

 

가족 사진 옆에는 큰 딸 민지가 10살 때 회사로 보낸 편지도 붙어있다. 

"아빠 저 민지예요.

아빠, 저 오늘 독서 시간에 '아빠가 내게 남긴 것'을 봤어요.

그 책은 아빠가 돌아가셔서 슬픈 이야기에요.

아빠,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 드라마가 잘 끝났으면 좋겠어요. 아빠 드라마 재미있어요.

아빠가 만드는 드라마 끝나면 아빠랑 같이 실컷 놀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언제 아빠가 돌아가신다고 슬픈 적이 있었어요.

아빠 생각 나시죠? 캐나다 갔을 때, 토끼 알레르기 왔을때 (대상포진)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아빠가 곧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엄청 슬펐어요.

저는 아빠가 죽고 난 후 일을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 했어요. 지금 살아있어 무척 좋아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해도 슬퍼요. 아빠, 드라마 잘 만드시고, 또 예전처럼 또 잠 많이 못 자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앞으로 많이 남았는데 잠 푹 ~~~ 자시고 건강 잘 유지하세요.

아빠! 화이팅이예요!~~~"

 

편지에는10살 난 자신과 4살난 동생의 그림이 있는데 그림으로 보면 둘다 키가 같다. (실제는 많이 차이 나는데 말이다.) 글도 그렇지만 그림을 보면 참 선한 아이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민지의 눈에는 동생과 자신이 평등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편지에 동생도 함께 그려넣는 것이 얼마나 이쁜가.

 

민지를 보며 늘 생각한다. 과연 나는 이 아이에게 받은 사랑을 평생 다 갚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 작가님과 같은 소원을 빈다.

'민지야, 너도 훗날 꼭 너같은 딸을 얻어서

아빠가 느끼는 지금 이 행복을 똑같이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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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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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12 0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네요..편지 정말 감동입니다!!^^

  2. 권오문 2013.12.12 1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의 글에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게 해주는 힘이 있네요.

    그동안 너같은 자식 낳아봐라는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이렇게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네요.

    제 아이들이 아직 제가 아빠라는 사실(?) 정도만 아는 거 같은데

    따님처럼 글을 써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pd님처럼 잘 기르면 가능할 지도^^

    저도 잘 키워볼게요.

    오늘은 더 춥답니다. 더 따뜻하게 입고 다니십시오.

    고맙습니다.

    권오문 드림.

  3. 와코루 2013.12.12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편지를 보니 아이가 정말 예쁘네요~!ㅎㅎ 저같아도 편지 붙여놓겠어요 ㅎㅎ

  4. 오렌지수박 2013.12.12 1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눈물이 핑 도네요. 고되고 힘들지만 아이들이 있어 더욱 삶이 빛나지 않나 싶습니다.

  5. 마르티나(Martina) 2013.12.12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지의 마음이 너무 예쁘네요!
    저는 아직 결혼도 못했지만, 나중에 아이 낳으면 꼭 '너같은 아이 낳아라' 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

  6. 물방울 2013.12.12 2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전 논스톱 시절부터 다음 까페 드나들며 피디님 글을 읽곤 했는데..오랜만에 이렇게 또 피디님 글에 댓글달고 있네요.뱃속에 공주님 품고서^^;;
    여전히 피디님 글은 따뜻합니다^^

  7. 베니스 2013.12.12 2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지가 부럽네요~^^ pd님 같은 좋은 아빠를 둬서요~~

  8. 강정 2013.12.12 2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샘솟는애정이!!아가가있어서삶이채워지는것같아요!

  9. 이게정상 2013.12.13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게 정상인데...

    <<너도 꼭 새끼나서 살아보거라

    더도 말고 너랑 똑같은 딸 낳아 널 정신병원과 중국사람 시켜 죽이란 말을 꼭 듣길 바란다

    그땐 내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2013년 12월 5일

    널 세상에 빠트린 육**...>>

    이러는 엄마(?)는 뭔지... 에휴.

  10. 두두아빠 2013.12.13 1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이네요. 귀딱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 '니도 애 키워보면 내 맘 이해할꺼다'였습니다.
    꼭 제 자신이 부모님이 짐이 된 듯한 기분이었어요.

    지금 고작 2년 남짓 아이를 키웠지만 그간 아이에게서 받은 웃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우리가 아이에게 빚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좀더 세련된 표현을 할 수 있을거 같아요 ㅎ

  11. 최윤희 2013.12.13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어머니는 저에게 매일같이 " 잘될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넌 싹수가 노래" 매일 이런 저주의 말을 퍼부었답니다. 제 아버지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을 매일 말도 못알아듣는 3살 어린아이에게 했구요 허허 지금 생각해봐도 신기합니다

    아무리 아이가 힘들고 힘겹게 해도그렇지...어떻게 그런 ...언어폭력을 행했는지...

  12. 김윤정 2013.12.13 16: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엄마한테 '꼭 너 닮은 애 낳아서 똑같이 겪어봐라.'라는 말씀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말 들을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저에게 그닥 큰 기대를 갖고 계시지도 않으셨는데
    번번히 속상하게 해드렸으니....
    전 제 자식이 저 닮을까봐 걱정입니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13. 2013.12.13 2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14. 김서회 2014.06.04 12: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식자랑 할만하네요...이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