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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짠돌이 육아 일기

꼭 너같은 애 낳기를

by 김민식pd 2013. 12. 12.

얼마전 어느 드라마 작가님이 들려준 이야기다.

"우린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말할 때 '내리 사랑'이라는 말을 씁니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훨씬 더 크다고. 과연 그럴까요? 어른의 사랑은 너무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않나요? 우리가 아이를 사랑할 때는 항상 무언가 조건이 붙고 무언가를 대가로 바라죠. 하지만 아기가 어린 시절 부모를 바라 보는 그 눈빛 속의 사랑, 그건 순수와 무조건적인 숭배, 그 자체죠. 저는 평생을 노력해도 부모로서 아이에게 받은 사랑을 갚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요. 너를 낳고 기르면서 난 평생 정말 행복했단다. 너도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면 꼭 너같은 아이를 얻기 바란다. 그래서 내가 받은 이 사랑과 행복을 느껴보기를."

 

나도 어렸을 때 같은 말을 들었는데 상황은 반대였다.

"너도 나중에 크면 꼭 너같은 애 낳기를 바란다. 그래서 너도 한번 똑같이 당해봐라."

작가의 따님과 달리 난 어려서 정말 사고뭉치였나 보다. 난 저 말이 참 싫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 내가 아이를 키우며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느낄까? 난 오히려 부모님이 참 가엾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늘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특히 아버지는 의사 아들을 만들지 못해 평생을 불행하게 사신 분이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삶을 지켜보며 느낀 안타까움이 있다. 당신의 인생도 뜻대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식의 인생은 자신의 뜻대로 되기를 바랬을까?

 

 

 

드라마 연출로 살며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는 게 내 일이다. 지시는 내릴 수 있지만 반드시 그들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한다는 법은 없다. 작가는 타이피스트가 아니고 배우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연출의 업무다. 내 뜻대로 모든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괴물이지, 리더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시청률을 행복의 척도로 삼지는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만든 드라마를 보느냐, 그걸 내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내 행복은 다른 이에게 휘둘리게 된다. 만드는 그 순간, 과정을 즐기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라면 한번 솔직하게 다시 한번 그 괴로움을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게 진짜 아이의 문제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심이 아이에게 투영된 문제인지. 그리고 제발 함부로 아이를 저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이보다 갑절의 인생을 산 어른이 아이와 실랑이 끝에 내뱉는 말이 "너도 나중에 너 같은 애 낳아봐라."는 아니지 않는가. 요즘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다. 아이를 기르는 일이 정신적 고통이고 경제적 부담이라고 느끼는 건, 어린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부모의 저주 탓이 아닐까? 부모가 교육과 육아로 늘 괴로워했으면서, 정작 아이에게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건 모순이다.

 

아버지로서 감히 말하자면 육아는 정말 축복이다. 아이가 태어나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 그 속에 담긴 사랑은 부모가 평생을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다. 

 

 

일산 MBC 드림센터 사무실의 내 책상에는 항상 가족 사진을 붙여놓는다. 일을 하며 항상 나는 육체적 정신적 한계에 부딪힌다. 드라마 촬영을 할 때는 집에 사나흘씩 못 들어가고 하루 2시간 자면서 밤샘 촬영을 강행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고 실제로 피디 중에는 과로사하는 이도 있다. 내 경우, '내조의 여왕' 촬영이 끝난 후 체력 저하로 대상포진이 와서 고생한 적도 있다. 

 

몸만 힘든게 아니다. 일을 할 때는 육체적으로 괴롭고 말지만,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정신적으로 괴롭다. '나는 연출로서 무엇이 부족해 회사에서 일을 시키지 않는 걸까?' 연출 17년차, 나는 안다. 시청자는 드라마의 팬이 되기도 하고, 안티가 되기도 한다. 제일 무서운 건 사람들이 외면할 때다.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냉정하게 말해서 드라마국은 피디간의 경쟁 시스템이다. 누군가 실패하면 그건 다른 이에게 기회를 뜻한다. 철저하게 외로운 조직이다. 가족의 사랑이 없다면 버티기 힘든 곳이다. 그래서 내 옆에는 항상 가족 사진이 있다.

 

가족 사진 옆에는 큰 딸 민지가 10살 때 회사로 보낸 편지도 붙어있다. 

"아빠 저 민지예요.

아빠, 저 오늘 독서 시간에 '아빠가 내게 남긴 것'을 봤어요.

그 책은 아빠가 돌아가셔서 슬픈 이야기에요.

아빠, 저는 아빠를 사랑해요. 아빠 드라마가 잘 끝났으면 좋겠어요. 아빠 드라마 재미있어요.

아빠가 만드는 드라마 끝나면 아빠랑 같이 실컷 놀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는 언제 아빠가 돌아가신다고 슬픈 적이 있었어요.

아빠 생각 나시죠? 캐나다 갔을 때, 토끼 알레르기 왔을때 (대상포진)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아빠가 곧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엄청 슬펐어요.

저는 아빠가 죽고 난 후 일을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 했어요. 지금 살아있어 무척 좋아요.

지금도 그 생각만 해도 슬퍼요. 아빠, 드라마 잘 만드시고, 또 예전처럼 또 잠 많이 못 자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제 앞으로 많이 남았는데 잠 푹 ~~~ 자시고 건강 잘 유지하세요.

아빠! 화이팅이예요!~~~"

 

편지에는10살 난 자신과 4살난 동생의 그림이 있는데 그림으로 보면 둘다 키가 같다. (실제는 많이 차이 나는데 말이다.) 글도 그렇지만 그림을 보면 참 선한 아이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민지의 눈에는 동생과 자신이 평등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편지에 동생도 함께 그려넣는 것이 얼마나 이쁜가.

 

민지를 보며 늘 생각한다. 과연 나는 이 아이에게 받은 사랑을 평생 다 갚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도 그 작가님과 같은 소원을 빈다.

'민지야, 너도 훗날 꼭 너같은 딸을 얻어서

아빠가 느끼는 지금 이 행복을 똑같이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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