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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정우성을 캐스팅하는 법

by 김민식pd 2013. 9. 5.

2000년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으로 연출 데뷔했을 때의 일이다. 피디가 되어 처음으로 프로그램을 맡았으니 의욕과 열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를 캐스팅하겠다는 욕심에 섭외의 달인이라 불리는 선배를 찾아갔다.

선배님, A급 스타를 시트콤에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네가 생각하는 A급은 누군데?”

이를테면 정우성이요?”

정우성이 청춘 시트콤에 나오겠냐?”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우성 집 앞에 가봐라. 너처럼 열정을 가진 피디가 열 명이 무릎 꿇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넌 가면 줄 끝에 서야 돼.”

슬픈 표정으로 선배님을 물끄러미 바라봤더니, 답답한 후배를 위해 선배는 무림비급을 펼쳐보였다.

민식아. 모든 피디들이 정우성을 캐스팅하겠다고 난리지만 그게 어디 쉽냐. 그런데 말이야. 사람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어. 그 정우성도 10 전에는 신인이었단다. 방송사마다 프로필 들고 피디들 쫓아다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지. 네가 해야 할 일은 지금 정우성을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10년 후 제2의 정우성이 될 신인을 발굴하는 일이야.”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톱스타 대신 신인 배우를 찾아 헤맸다. 100여명의 프로필을 보고, 그 중 20명의 오디션을 본 후, 딱 한 명 뽑은 친구가 있는데 그가 바로 조인성이다.

 

신인과 스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게 다르다. 신인은 촬영장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스타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신인들이 NG를 낼 때, 눈앞에 보이는 건 자기 때문에 벌을 서는 어떤 남자다. 동시 녹음 드라마를 촬영하는 현장에는 마이크맨이 있는데, 그는 항상 두 팔로 5미터 가까운 붐 마이크 대를 들고 일하는데 그건 말 그대로 벌서는 자세다. 신인이 대사 NG를 내서 촬영을 다시 하면, 그 남자의 벌서는 시간은 더 늘어난다. 신인에게는 그런 모습만 눈에 보이니까 한번 실수하면 긴장해서 오히려 더 틀리고 그러다보니 머릿속은 하얘지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간다.

 

신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스타에게만 보이는 건 무엇일까? 스타들 눈에는 카메라 앞을 지키고 선 제작진보다 TV 화면 앞에 앉아있는 시청자들이 보인다. 밤샘 촬영을 해도 지칠 줄 모르고, 감독이 NG를 외쳐도 외려 더 멋진 미소를 짓기 위해 스타가 노력하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모습에 열광하는 여성 시청자들의 반응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 연출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신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뉴논스톱촬영장에 조인성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소녀팬이 아이돌 그룹을 영접하듯이 달려 나갔다.

어제 시청자 게시판 봤니? 조인성이 박경림에게 사랑 고백하는 장면에서 완전 난리 났잖아. 요즘 주위에서 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니까?”

모니터에 조인성의 얼굴이 잡힐 때마다 나는 탄성을 질렀다.

우와, 진짜 잘생겼다. 사내라면 저 정도는 생겨줘야 하는 데 말이야. 도대체 우리 부모님은 왜 날 이 지경으로 낳으셨냐고!”

오해하지 마시라. 내 취향은 아니다. 다만 꽃미남을 보고 환호하고 있을 여성 시청자의 반응을 내가 촬영장에서 몸소 재연하느라 그런 거다.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방법? 신인을 스타로 대접하면 된다. 연출자가 배우를 신인 취급하면서 시청자들이 그를 최고의 배우로 받아들이기를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그에게 긍정의 리액션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구박만 하면서 그가 세상에 나가 최고가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앰블러 9월호 '김피디 가라사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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