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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다빈치와 반고흐

by 김민식pd 2013. 10. 24.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중에 편집자님들도 계신가봐요. 가끔 원고 청탁이 들어옵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블로그에 공짜로 글 쓰는 걸 즐기는 (^^) 제게 원고료까지 주시고 귀한 지면도 주시니... 최근에는 '다빈치'라는 에세이지에서 청탁이 들어왔어요. 그 잡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다빈치라는 계간 에세이지 이름을 듣고 처음 머리에 떠오른 건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기술자, 해부학자, 식물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이 모든 직업을 가졌던 사람. 한 가지 일만 잘하기도 힘든 현대인들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근대적 인간의 전형, ‘다 빈치말이다.

 

드라마 피디로 사는 나는 다 빈치같은 르네상스 적 인간의 삶을 꿈꾼다. 작가와 만나서는 재미난 이야기가 갖춰야할 요소는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배우와 일할 때는 희극과 비극의 리액션 연기가 어떻게 다른지 논하고, 촬영 감독과 작업할 때는 화면에서 인물과 여백의 황금비가 얼마일까 고민한다. 그러면서도 음악 감독을 만나면 내가 원하는 분위기의 음악이 어떤 느낌인지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몇 곡의 예는 들 수 있어야 한다.

 

드라마 감독은 문학, 연기,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정통한 사람 같이 들리지만, 고백컨대 나의 경우는 두루두루 얄팍한 지식으로 아는 척 넘어가는 것이다. 내가 상대하는 이들은 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들인데, 다 빈치 같은 천재가 아닐 바에야 어찌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대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방송에 얼굴을 내놓고 연기하는 배우에게 악역을 주문하고, 미학을 고민하는 카메라 감독에게 과도한 클로즈업을 주문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피디는 모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선배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성공에 대해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리고, 실패에 대해서는 혼자 책임지는 게 피디다.” 작품이 망했을 때, 남 핑계 댈 이유가 없다. 작가, 배우, 스탭을 결정하는 게 피디이므로 결과에 대해 오롯이 혼자 책임질 수 있어야한다. 숨을 곳이 없는 피디 인생, 참 팍팍하다.

 

20대에 어느 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일주일 간 공들여 만든 마케팅 제안서가 직속 상사인 대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내가 만든 결과물이 단 한 사람의 취향에 따라 평가받는다는 것은 때로는 억울하고 때로는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직장을 다니는 건, 일이 좋거나, 돈이 좋거나, 사람이 좋거나, 이유는 셋 중 하나인데, 직장을 그만두는 건, 오로지 사람이 싫어졌기 때문이란다. 나 역시 첫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상사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나는 단 한 사람에게 나를 평가 받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피디가 되어보니 알겠다. 한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건 무수한 대중들에게 내가 만든 결과물을 평가받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좌절했을 때, 상대의 안목이 부족한 탓이라고 핑계 댈 거리나 있었는데,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외면 받았을 때는 그렇게 숨을 곳도 없었다. 그나마 영업사원은 월별로 실적을 내기에 월말에 조금 스트레스 받고 마는데, 피디는 매일 매일 시청률 표를 받아든다. 결과에 목매다보면 정말 괴로워지는 피디 인생, 어떻게 살아야갈까?

 

창조적 삶을 꿈꾸는 사람으로 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다 빈센트 반 고흐 같은 인생을 꿈꾼다. 강의를 하며 피디 지망생들에게 반 고흐가 제 인생의 지표입니다.” 라고 말하면 왜 하필 그렇게 불행하게 살다 간 사람을 롤 모델로 삼으시나요?”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반 고흐가 과연 불행한 사람이었을까?

 

반 고흐가 평생 돈 받고 판 그림은 달랑 한 장이었지만, 생전에 그린 그림은 4천장이 넘는단다. 이런 사람이 어찌 불행하단 말인가. 그림을 열 장 스무 장을 그려도 팔리지 않아 불행했다면 고흐는 그 시점에서 화가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림이야 팔리건 말건 해바라기를 그리는 순간,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는 순간 매순간이 고흐에겐 행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빈센트 반 고흐가 존재하는 거다.

 

반고흐, 마지막 70이라는 책을 보면, 고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오베르에서 70일을 지내며 80장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그림들을 보면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프랑스 시골 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즐긴 사람이다.

 

이번 영화는 무조건 5백만은 넘겨.” “이 대본은 시청률 20은 반드시 넘게 되어 있어.” 연출 경력 17년차가 되니, 흥행 결과를 장담하는 이들은 대중문화를 모르거나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비자의 취향을 가늠하기란 참으로 어렵기에 난 대중의 취향보다 자신의 취향을 더 고민한다. 대본을 고를 때, 난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장르,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선택한다. 그래야 밤샘 촬영을 해도 힘들지가 않다.

 

직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드라마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점치기 어려운 만큼, 앞으로 잘나갈 직업을 점치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취업의 불확실성이 크기에 공무원 같은 안정적인 직업의 선호도가 올라가는 모양인데, 세간의 평가나 이목으로부터 자유롭다면, 누구나 즐거운 자신의 일을 찾을 수 있다.

 

드라마를 선택할 때, 딱 하나만 고민한다. 과정을 즐길 수 있을까?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결과가 나빠도 후회는 없다. 고흐처럼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언젠가 사람들이 좋아해주길 바라며,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지금 현재에 충실하며 산다.

 

(계간 에세이 매거진 '다빈치' 2013. vol.2, 가을호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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