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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드라마 피디 해먹기 참 힘든 나라

by 김민식pd 2013. 10. 10.

한국 드라마에는 왜 늘 불륜만 나오나요?”

직업이 드라마 피디다보니 이런 질문 자주 받는다. ‘미드일드를 많이 접하는 사람이라면 왜 한국에서는 전문직 드라마나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의아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도 드라마 피디로서 책임감을 갖고 새로운 소재, 새로운 장르의 드라마를 모색해봤다.

 

한때 미국 정치 드라마 웨스트윙을 참 좋아했다.

 

대통령 참모를 주인공으로 저렇게 수준 높은 정치 드라마를 만들 수도 있구나. 그럼, 청와대를 무대로 한국판 웨스트윙을 한번 기획해볼까? 그랬더니 갑자기 윤창중사건이 터졌다. ‘웨스트 윙을 보면 백악관 대변인은 매일 기자들과 신경전을 펼치면서 대통령의 정책이나 동정이 언론에 어떻게 그려지는지 파악하느라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던데, 우리네 대변인은 방미 일정 그 바쁜 와중에 여대생 인턴을 어떻게 호텔방으로 끌어들일까 고심하느라 전쟁 같은 밤을 보낸다. 하긴 요즘처럼 정권과 언론이 찰떡궁합 밀월관계를 자랑하는 판에 대통령 대변인이 바쁠 게 뭐가 있으랴. 이런 판국에 청와대 참모진과 언론의 긴장 관계를 드라마 소재로 다루었다가는 웃음거리 되기 딱 좋겠다.

 

한때 주인공의 하루를 통으로 같이 보내겠다며 날밤을 새며 보던 드라마가 미국 첩보 액션물 ‘24’. 대테러 공작요원의 하루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24부작 리얼타임 드라마, 정말 참신한 발상인데, 테러 위협을 극화하기에 세계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만큼 좋은 나라가 어디 있으랴. 그래, 국정원 요원을 주인공으로 잭 바우어 못지않은 액션 히어로 한 명 탄생시키는 거야! 그랬더니, 젠장....... 우리나라 대테러 공작 요원은 오피스텔에 앉아 오늘의 유머사이트에 댓글이나 달고 있다. ‘국가정보원이라고 하면서 정치적으로 불리할 때는 국가의 최고기밀 공개도 불사한다. 국정원이 국정을 농단하는 마당에 한국판 첩보액션물, 씨알도 안 먹힐게 뻔하다.

 

할 수 없이 다른 쪽 주인공을 한번 찾아봤다. 영화 레미제라블이 흥행하는 것을 보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젊은 혁명가 이야기도 매력 있을 것 같다. 그래, 우리 국민들은 예로부터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세상의 차별을 딛고 일어나 무도가 행복한 세상을 꿈꾼 혁명가들을 좋아했지. 우리 주변에는 그런 멋진 혁명가가 없을까? 그랬더니 갑자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이 터졌다.

 

국정원의 발표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혁명조직 ‘RO-Revolutionary Oraganisation’는 참으로 가여운 사람들의 모임이다. 정작 북한으로부터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지 기껏해야 장난감 총 개조해서 유류창고나 통신시설을 공격하자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 농담도 이렇게 귀여운 (혹은 가여운) 농담이 다 있나. 이런 수준의 집단이 내란을 일으켜 나라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국정원, 너무 순진한 거 아닌가? 그나저나 혁명가를 주인공으로 다루는 드라마도 쉽지 않을 것 같으니 드라마 피디 해먹기 참 힘든 세상이다.

 

작년 대통령 선거 후보자 토론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했다. ‘이정희 대표가 꽤 세게 나오네? 내년에 국정원에서 통합진보당 간첩단 사건 하나 터뜨리겠는 걸?’ 혼자 그런 불온한 상상을 하면서 키득거렸다. 서울대생들이 사제 폭탄으로 정부청사를 장악하려고 했다는 유신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나라의 수준을 어떻게 보고 그런 상상을! 그런데 30년 만에 내란 음모 사건이 터지는 걸 보니 황당하다. PD로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고 살아야 할 텐데, 상상력이 현실의 황당함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니, 이거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피디 저널에 9월에 기고한 글입니다. 시의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뭐... ^^

지난 3주간 가족과 스페인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오느라 블로그가 좀 뜸했어요.

뭐, 놀 때는 놀아야하니까요. 여행기는 천천히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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