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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드라마 '나인'을 보며 든 생각

by 김민식pd 2013. 5. 23.

드라마 피디들이 정작 남이 만든 드라마는 즐기지 못합니다. 잘 만들면 배가 아프고, 못 만들면 괜히 흉만 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보기 쉽지 않죠. 그런데,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인'은 간만에 정주행의 즐거움을 맛 본 드라마였어요. 오죽하면 영화도 조조만 고집하는 짠돌이가 이 드라마 때문에 CJ E&M 월정액 서비스를 신청했겠어요. (이 드라마는 드문드문 보지 마시고, 가급적 처음부터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보셔야 그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어요.)

 

볼수록 매력있는 드라마에요. 드라마 연출로서 남이 만든 드라마에 쓴 소리도 좀 하고 싶지만, 정말이지, 흠 잡을 데가 하나도 없군요. 처음에는 SF 매니아로서, 본격적인 시간여행을 한국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다룰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봤는데요. 시간여행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가지고, 무척이나 대중적인 성공을 일구어냅니다. (과거 '조선에서 왔소이다' 때의 저의 초라한 실패가 다시 떠오르는 군요. ^^) 

 

이진욱!

누가 뭐래도 감히 주장할 수 있는건, 신인이던 이진욱을 처음 드라마 원 톱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던 건 바로 저라는 거! 네, '비포 앤 애프터 성형외과' 연출하던 시절이었죠. (네, 다른 작품의 성공을 빌어 슬그머니 자신의 안목을 끼워팔려는 이 비굴한 자세! ㅋㅋㅋ 어쩌겠습니까. 연출 쉰 지 오래되었지만, 저도 드라마 PD라구요. 일해야지요. 폭풍 성장하신 이진욱님, 꼭 다시 한번 주인공으로 모시고 싶어요. ^^)

 

배우와 연출, 하나 하나 다 탁월하지만, '나인'의 최고 미덕은 역시 상상을 초월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대본입니다. 송재정 작가님의 대본 구성에서 웅장한 스케일과 꼼꼼한 디테일을 동시에 맛 볼 수 있어요. 워낙 시트콤을 잘 쓰시던 작가라 그런지 ('순풍 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 등 집필) 에피소드 하나 하나의 완결성도 뛰어나면서도 드라마 전체를 끌고 가는 이야기의 힘도 강하군요. 시트콤의 장점을 드라마에서 잘 살린 대본, 아, 완전 탐났어요. (아마 공중파에서 러브콜이 쇄도할 것으로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도 다음 작품은 정액제 서비스를 따로 신청할 필요가 없는 공중파에서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

 

'나인-아홉번의 시간 여행'을 보면 신비의 향을 피우면 과거 특정 시간대로 타임 슬립을 할 수 있다고 나옵니다. 드라마에 빠져서 보다가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게 저런 향이 있다면, 나는 언제로 돌아가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한참 동안 곰곰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 '없다.' 였어요. 47년을 살아왔는데 어느 한 순간도 바꾸고 싶은 순간이 없었어요. 순간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솔직히 살면서 제 인생이 어디 순탄하기만 했겠습니까? 다만 무엇 하나 바꾸어서 지금 나의 삶이 바뀌는건 두려워요. 지금 내가 가진 삶이 대단한 기득권이라 그걸 잃는게 싫은게 아니구요.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삶의 추억을 잃기 싫어요. '나인'을 보며 주인공의 괴로움에 가장 크게 공감한 장면이 과거의 추억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어요. 함께 나눈 사람과 공유할 수 없는 추억은 백일몽이나 공상에 불과하잖아요. 17년간의 연출생활이든, 13년간의 결혼생활이든 하나하나 다 소중한 추억입니다. 특히 아내와 딸들과 함께 공유해온 기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삶의 존재증명이거든요. 

 

드라마 '나인'에 나오는 향의 힘을 빌지 않고도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요. 바로 미래로 가는 시간여행이죠. 매일매일 정해진 속도대로 오늘이라는 시간은 흘러가고 나의 현재는 꼬박꼬박 과거로 변해갑니다. 시간여행을 즐기는 최고의 방법은, 매 순간 현재를 즐기는 겁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놓고 미련과 후회로 괴로워하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불안에 떨 이유가 없어요. 그건 과거와 미래 때문에 현재를 죽이는 일이니까요. 나의 미래는 싫든 좋든 곧 나의 현재가 되고, 나의 현재가 쌓여 나의 과거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면, 미래에 후회는 없을 거에요. 즐거운 과거만이 남을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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