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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생방송 무대에 올라가 춤추는 피디

by 김민식pd 2013. 5. 7.

1997년 가을, MBC 수습사원 딱지를 떼고 예능 프로그램에 배치된 지 석달 쯤 되었을 때였다. '인기가요 베스트 50'이라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 조연출이었는데, 당시 내가 하는 일은 인터콤을 차고 플로어를 뛰어다니며 가수들 무대 등퇴장 관리하고 생방송 중 혹시 누가 무대에서 바지를 벗지나 않는지 감시하는 일이었다. (?) 실은 가장 큰 일은 당시 양대 산맥이었던 H.O.T와 젝스키스 팬들이 혹시나 객석에서 싸우지 않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9월에 추석 한가위 특집을 하는데, '카메오를 찾아라' 라는 테마로 진행되었다. 어느 가수가 노래하는 무대에 다른 가수가 바이올린 연주자로 분장하고 나온다거나 백댄서로 나오거나 하는 깜짝 출연 코너였다. 생방송 마지막 리허설을 하다가 당시 연출이던 이흥우 선배님이 "마지막 설운도 사랑의 트위스트 때는 전 출연자가 카메오를 하면 어떨까? 모두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는 거지." 와우, 재밌겠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준 일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은 일이라더니, 막상 리허설을 하는 동안에는 서로 눈치보느라 나서서 춤추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이흥우 선배님이 신입 조연출인 나를 돌아보셨다. "김민식 씨, 무대에 올라가서 춤 추세요." ???? "인터콤 춤추다가 한 사람씩 앞으로 큐사인 받고 보내세요." 

 

조연출 된지 3개월밖에 안된 신입 사원 더러 생방송 중 무대에 올라가 춤을 추라니..... 겁이 났다. '빼야하나? 죄송하지만 FD에게 시키겠습니다. 해야하나?' 오만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지만 난 그냥 "예, 선배님!" 하고 답했다. 어떤 일이 주어지면 일단 "예!" 하고 본다. 연애든 여행이든 일단 저지르고 후회는 나중에 하는데, 지나고보니 후회되는 일은 거의 없더라. 아프게 차인 실연의 상처도 지나고나면 아스라한 추억이 되니까.

 

그래서 나온 장면이다. 자세히보면 연예인들 가운데 민간인이 하나 섞여 있다. 그게 나다. 

 

 

추석 때였는데, 일하느라 고향에 인사드리러 내려가지 못했다. 예능 피디들은 명절 때 각종 특집 만드느라 더 바쁘다. 대신 TV 출연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인사 드렸다. 공대를 나온 아들이 MBC 피디로 입사한 게 실감나지 않던 아버지께 재미난 선물이었을 것이다. 당시 아버지 말씀. "그래서, 피디가 하는 일이 무대에 올라가 춤추는 거냐?"

 

 

 

주말에 강화도 고려산 진달래 축제에 다녀왔다. 어린이날인데 차가 막히지 않을까? 산에 갔다가 사람에 치이다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나서고 본다. 빡세게 고생이라도 하면 언젠가 그건 내 드라마의 디테일이 될 것이다. 몸을 사리기보다 일단 시도하고 보는 것. 그게 남는 장사다.

들에 핀 꽃이 부르면 '네!' 하고 달려나가고

산에 내린 눈이 불러도 '네!'하고 쫓아나간다. 

흐드러진 꽃 속에서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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