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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4천만을 웃겨라

by 김민식pd 2013. 4. 18.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일이다. 국사 시험 마지막 주관식 문제, ‘최치원의 사산비 중 하나의 이름과 그 소재지를 쓰시오.’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지은 비문이 전국에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쓰라는 문제였다. 이를테면 진감선사 대공탑비, 지리산 소재,’ 이런 식으로. 분명 국사 시간에 배웠는데 막상 쓰라고 하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 4개 중 사산비가 아닌 것을 찾으시오.’ 하면 찍기라도 할 텐데, 하필 주관식이란 말이냐. 빈 칸으로 내기 싫어 머리를 쥐어뜯다 최선을 다해 답을 적어냈다.

 

일주일 후 국사 시간, 엄숙한 표정 탓에 상영 대사라는 별명을 가진 이상영 국사 선생님이 교실에 오셨는데, 그날따라 표정이 더 무서웠다. 선생님은 채점한 답지를 들추며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셨다. 네 명의 학생들이 나오자 칠판에 손을 짚고 엎드리게 하여 줄빠따를 놓으셨다. “? 상영대사 송덕비? 무학산 소재?” 선생님의 별명으로 발칙한 비명을 만든 아이들의 비명이 학교 뒷산인 무학산에까지 울려 퍼졌다. ‘감히 선생님의 존함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맞아도 싸지........’

 

너희들은 이제 들어가.” 선생님은 다시 답안지를 뒤적이셨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35, 김민식, 앞으로 나와!” 쭈뼛쭈뼛 나갔더니 선생님이 코앞에 내 답안지를 들이미셨다. “? 에베레스트 산에 뭐가 있어? 민식 대왕이 어쩌고 어째?” 그렇다, 나는 채점에 지치신 선생님께 작은 웃음을 선사하고자 이렇게 적었던 것이다. ‘민식 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에베레스트 산 소재.’ 나의 기획 의도는 실패였나 보다. 내 답안은 웃음보다 분노를 불러일으켰는지,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가 오래도록 매를 맞았는데, 당시의 일은 상영대사와 민식 대왕의 교무실 대첩이란 이름으로 회자되었다.

 

나는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학교 다닐 때 한 반에 그런 아이 하나씩 꼭 있지 않나? ‘이 한 몸 버려 웃길 수 있다면!’ 내가 그랬다. 사람을 웃기고 싶다는 열망은 아직도 뜨겁지만, 이제는 매를 팔아 웃음을 사지는 않는다. 대신 나의 못생긴 외모로 자학 개그를 날릴 뿐이다. 까무잡잡해서 동남아 필로 생긴 나의 외모는 최고의 개그 소재다. “제가요, 필리핀 가는 비행기를 탔더니, 승무원이 영어로 물어요. ‘What would you like to drink?’ 어이가 없어서 그냥 콜라 주세요.’ 했더니, 직원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어머, 한국말 참 잘하시네요?’ 뭐 그런 식이죠.” 대학 시절 미팅에 나가서도 늘 개그로 분위기를 띄웠는데, 당시 친구들이 매번 나를 미팅에 데려간 게, 나의 유머 감각 덕분인지, 자신들의 외모를 돋보이게 하려는 수작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영업사원으로도 일하고, 통역사로도 일했는데, 그때마다 다들 내게 개그맨을 해보라고 권했다. 그만큼 영업이나 통역 실력은 시원찮았다는 뜻일 게다. 나이 서른에 개그맨이 되기엔 버거워서 코미디 피디를 지원했다. 면접관이 물었다. “왜 예능 피디가 되고 싶습니까?” “전 세 사람을 만나면, 셋을 웃기고, 열이 모이면 열을 웃겨야 합니다. 만약 제게 기회를 주신다면 4천만을 웃기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결국 피디가 되어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이나 내조의 여왕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연출하게 되었으니 매품 팔아 친구들을 웃기던 학창 시절이랑 비교하면 정말 출세한 거다.

 

우리집 늦둥이, 여섯 살 난 딸 민서는 밥 먹기 싫을 때마다 온갖 핑계를 다 댄다. 그때마다 아내는 걱정이다. “쟨 왜 저렇게 거짓말을 잘 하지?” “부인, 저건 거짓말이 아니라 창의성이 뛰어난 거야. 여섯 살짜리 아이인데 상상력이 정말 대단하지 않아? 쟤는 나중에 작가를 하면 대성할 거야.”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혔다면 너무 걱정 마시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운다는 건 규율에 얽매이기보다 상상력과 끼를 주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미래 창의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가 되려고 그러나보다하고 너그러이 지켜봐 주시길.

 

행복한 동행 5월호, 김PD 가라사대

(매일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지면까지 허락해주시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블로그를 보고 원고청탁주신 편집자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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