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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드라마 피디가 본, 영화 '지슬'

by 김민식pd 2013. 4. 10.

영화 '지슬'을 보았다. 드라마 피디로 본 영화평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부럽다' 였다. 

'지슬' 이야기는 씨네21을 통해 작년에 자주 접했다. '독립영화계 최고의 걸작' '기적같은 영화' 난 사실 영화주간지의 이런 기사에는 좀 반신반의하는 게 사실이다. 드라마 피디로서 대중들의 감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평단에서 극찬하는 예술 영화에 대해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어려운 영화보다는 재미있는 영화를 본다. 그래야 코미디 연출가로서 자신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드라마 피디는 예술가가 아니다. 예전에 선배가 그랬다. 

"민식아, 예술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네 돈 갖고 해라. 남의 돈 갖고 예술하는 거 아니다."

광고를 붙여 팔아서 먹고사는 방송사 피디는 무조건 시청률을 목표로 일해야 한다. 그게 월급쟁이로 사는 이의 사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성공은 별개의 가치라고 생각하며 사는데, '지슬'을 보고나니 그런 내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지슬'은 분명 예술 영화다. 감독이 너무나 하고 싶은 이야기라 척박한 환경에서 모든 여력을 쥐어짜 만든 영화다. 제작진 자막이 올라갈 때 이름을 들여다보시다. 배우가 스태프로도 나오고 합창 코러스로도 나온다. 예술영화의 작업 방식이지만 결과물은 훌륭한 상업 영화 뺨친다.  웃겨야 할 때는 웃기고, 슬픈 장면에서는 울리고,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든다. 정말 놀라운 영화다.

 

 

 

 

드라마 연출로서 배운 것도 참 많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감독은 배우들의 동선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낸다. 카메라 워킹을 최소한으로 하고 찍지만 그림이 절대 단조롭지는 않다. 토벌대를 피해 도망온 주민들이 구덩이에 하나둘 모여든다. 둘 셋 모여들다 나중에는 프레임에 걸쳐지는 인물도 있고 끝에 가서는 앵글이 미어터질듯 난장이 펼쳐진다. 긴장되는 장면이지만 웃음이 쿡쿡 나오기도 하고 웃기는 장면에서 어느 순간 서늘해진다. 

 

필름이 사라지고 디지털 녹화방식이 도입되면서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어느 순간 콘티가 사라졌다. 다양한 사이즈의 그림을 몽땅 찍어놓고 편집실에서 알아서 흐름을 만든다. 그러다보니 한 컷 한 컷 공들이는 맛이 좀 떨어졌다. 무수한 컷이 쉼없이 바뀌며 시선을 잡아둘 뿐이다. 하지만 '지슬'의 장면 연출은 묵직한 힘이 있다. 무대 동선을 연출한 분이 앵글을 어찌 이리 잘 만들까? 역시 어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면 다른 분야도 쉬워지나보다. 거리극을 많이 만든 감독답게 군중씬 연출이 기가 막혔다. 영화 내내 눈에 익은 배우 얼굴은 안나오지만, 그런 점이 자연스러운 연기를 끌어내기 위한 감독의 작전처럼 읽혔다. 독립영화가 가진 장르적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것, 이 영화가 달리 '걸작'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는 상업적 장르로서 드라마가 지닌 한계만 붙들고 있었다... 정말 부럽고 부끄럽다.

 

한 달 전에 제주 올레 여행을 갔다가 다랑쉬 오름을 간 적이 있다. 유홍준 선생의 답사기를 읽고 간 터라, 그 옆 4.3 유적지인 다랑쉬 굴에도 들렀다. 다랑쉬 오름을 오르며 아래의 장면을 찍었다. 오름의 곡선이 여인의 순한 가슴같다는 얘기를 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오름에 대한 느낌이 또 달라졌다. 아마 다음번에 제주를 가면 생각할 거리가 더 많아지리라.

 

무엇을 잘 만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강한 동기부여이다. 오멸 감독의 '지슬'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씻김굿이다. 영화 한 장면 한 장면 정성스레 제사상을 차리고 조상의 혼을 위로한다. 이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던 감독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 덕에 영화는 정말 잘 나왔다. 

 

드라마 피디로서 평소 내가 작품을 만들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나도 과연 저만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까? 장인정신을 가지고 한 장면 한 장면 공을 들일 수 있을까? 내가 평소 일하던 방식을 돌아보고, 척박한 제작 환경에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인 감독의 집념이 새삼 부러웠다. 창작자가 가져야할 첫번째 자세는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지슬' 드라마 피디 지망생들은 꼭 보시길...

제주 올레길을 사랑하시는 분도 꼭 보시길...

아름다운 제주 산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걷는 것과 모르고 걷는 것은 다를듯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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