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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신입피디 면접장의 남과 여

by 김민식pd 2013. 3. 26.

(오늘은 간만에 특강 선생님 모십니다. 요즘 새벽에 일어나 108배하고, 새벽반 중국어 학원 다니느라 시간이 없어 요령 부리는 거 아닙니다. 연출은 모든 일을 혼자 다 하기보다 주위에 역량이 뛰어난 사람을 모아 위임을 실천하는 직업이구요. 이렇게 게스트 섭외를 하는 것도 다 피디의 일이라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 아, 궁하다, 궁해. ^^

MBC 예능국 권석 선배님의 책, '아이디어는 엉덩이에서 나온다'에서 나오는 면접 이야기입니다. 피디 스쿨에서도 소개하고 싶어 올립니다.)

 

신입 PD 면접장의 남과 여

           권석 

 

MBC 예능PD 신입사원을 뽑는 데 면접관으로 참여했다. 최종 면접은 아니지만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한 응시자들의 잠재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요즘의 취직난을 반영하듯 이번에도 엄청난 경쟁률을 보였다. PD·기자·기술·경영 부문을 합쳐 10여 명 뽑을 예정인데 1만명이 넘는 지원자들이 모였으니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예능PD라면 무조건 튀고 끼가 넘치는 돌아이를 뽑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PD는 예술가이기보단 직장인이다. 매주 정해진 시간에 방송될 프로그램을 생산해야 하고 또 여러 부문의 사람들과 협업을 해야 하기에 성실성과 친화력이 기본이다. 창의력과 모험심은 그 다음이다.
   
   재밌는 것은 최종 몇 명을 뽑느냐에 따라 선발 기준이 달라진다. 적은 수를 뽑을 때는 보수적으로 선발한다. 튀는 사람보단 안정되고 성실한 지원자를 뽑는다. 위험관리를 하는 셈이다. 선발 인원에 여유가 있을 때는 성실한 사람을 우선 뽑아 놓고 여기에 더해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되는 럭비공 같은 사람도 뽑는다. 럭비공 신입사원은 모 아니면 도다. ‘모’인 경우엔 작전 대성공이고 ‘도’일 경우엔 나머지 신입들이 ‘걸’쯤 해주니 평균을 내면 실패는 아니다. 실제로 예능국 선후배를 살펴보면 한두 명이 입사한 해의 PD들은 평범한 반면 동기들이 많은 기수의 PD들은 훨씬 다양하다. 그리고 스타PD는 신입을 많이 뽑았던 기수에서 나온다.
   양에서 질이 나오는 셈이다.

 

 

 

  면접을 보면서 느낀 점 몇 가지. 면접관들끼리 공감했던 부분이다. 우선 스펙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출신학교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원서를 채우기 위한 어학연수, 교환학생, 높은 토익점수, 자격증, 해외봉사활동 등의 스펙 쌓기는 이미 너무 흔해서 더 이상 가치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또박또박 정규과정을 밟으며 국내에서 크고 작은 경험들을 쌓은 지원자들의 순박함이 돋보였다.
   
   똑부러지는 여자들과 어리숙한 남자들의 대비는 여전했다. 언제부터인가 방송국에 여성 스태프가 늘기 시작했다.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여자PD는 남자들만 뽑으면 욕먹으니까 구색 맞추기로 끼워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요즘 신입PD는 남녀 비율이 거의 반반이다. 금녀의 구역이었던 기술 직종에도 여자 후배들이 대거 진입했다. 뉴스데스크를 보노라면 어린 여자 기자들이 오프닝 꼭지들을 맡아 방송한다. 편성부문은 남자가 소수세력이 됐다. 회식자리에서 남자 편성PD들은 구석으로 밀려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떤다고 한다. 프로그램 회의를 하다 둘러보면 방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일 때가 흔하다. 작가, AD, FD까지 모두 여자다. 여자들이 방송을 만들다 보니 방송이 여성화된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자라는 우리 아들들도 수컷 본능을 잃고 여성화된다.
   
   이런 여성화 세태를 조금이라도 막아보겠다는 비장한 명분 아래 아예 처음부터 남자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겠다고 작심하고 면접 평가에 임했다. 하지만 역시 수험생들을 만나 보니 여자들은 눈빛부터 달랐다. 초롱초롱 빛이 났고 말도 어찌 그리 조리있게 잘하는지. 이에 반해 남자들은 산만하고 면접관과 쓸데없는 기싸움을 벌이다가 동문서답하기 일쑤였다. 면접 중간에 내 채점표를 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반대로 여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음을 발견했다. 남 탓할 일이 아니다. 면접관도 역시 남자는 덜떨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느낀 점. 풍요 속의 빈곤이다. 지원자들이 다 고만고만할 뿐 눈에 확 띄는 인물은 없었다. 거칠고 모났지만 잠재력이 엿보이는 원석을 찾고 싶은데 대부분은 이미 둥글둥글 닳고 다듬어져 특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돼 보였다.
   
  인상 깊은 지원자가 있었다. 나이는 30대이고 4년 반 동안 백수로 지내고 있다는 친구였다. 대학 때는 학교신문 편집장을 맡아 잘나갔지만 막상 졸업 후에는 사회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면접자리에선 일부러라도 외향적으로 보이려고 애쓰기 마련인데 이 친구는 처음부터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을 솔직히 보여줬다. 지금 심정을 물어보니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란다. 취업시험을 치면서 집착할 때마다 어김없이 상처받았다면서 이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단다. 그러면서 만약 PD가 된다면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돼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며 숨은 꿈을 밝혔다. 그에게 최고점을 줬다. 모 아니면 도다. 제발 내 안목이 맞길. 미래의 스타PD를 내가 미리 알아봤길 기대한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면접자는 MBC에서는 떨어지지만, 경쟁사에서는 합격했답니다. 언젠가는 권석 선배의 안목대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돼줄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타 피디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30대 넘어 입사하는 사람도 많구요. 다른 직장 다니다 오는 사람도 많아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집중하는 게 면접인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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