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박스 코엑스에 안나 카레니나를 보러 갔다가 나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에반게리온 Q, 드디어 오는구나!
나는 에바 덕후다. 에반게리온이라면 벌써 대여섯번을 보았는데, 아직도 에바라 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1995년에 처음 비디오로 접했을 때는 그냥 로봇 만화영화인줄 알았다. 그러다 당시 키노에서 특집으로 나온 에바 해설 기사를 읽고, 그 심오한 작품 세계에 반했고 97년에 일본 연수 갔다가 신주꾸에서 첫번째 영화판 Death and Rebirth를 보았다. TV판을 재편집했을 뿐인데도, 그 구성이 참 놀라웠다. 네 명의 주인공을 현악 4중주의 악기로 나눠 하나 하나 따로 소개하는 과정. 역시 똑같은 재방송이라도 구성이 들어가느냐 마느냐에 따라 보는 맛이 달라진다.
TV판 재편집 개봉만으로도 극장 수입을 꽤 올린 가이낙스는 이후로도 덕후들 주머니 터는 재미에 맛들였다. 음질을 5.1채널로 재녹음 한 걸로 리뉴얼 판 디브이디를 내고, 방송에서 이상하게 엔딩을 내놓고는 극장에서 End of Evangelion을 개봉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온갖 피규어니, 콜렉터스 아이템이니 하는 걸로 이미 호구잡힌 덕후들을 울궈내더니 급기야 아예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극장 개봉판을 만들어냈다.
'에반게리온 : 서' 만 해도 그랬다. '음, 역시 그냥 CG만 더 보강한 재개봉판인거지? 그런다고 내가 속을 줄 알아?' 하면서도 극장가서 넋을 놓고 봤다. '음, 그래도 다시 보니 또 좋군. 역시 에바야.' 그러다 '에반게리온 : 파'를 보고는, '뭐야,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네? 그리고 에바도 하나 늘었어? 헐! 대박~' 그러다 작년에 나온 '에반게리온 : 큐' 의 예고편을 보고 완전히 낚이고 말았다. '뭐야, 심지어 네르프말고 새로운 비밀 조직이 나온단 말이야? 그럼 이건 또 안 볼 수가 없잖아!' 덕후란 이렇게 단순하다. 첫사랑 그녀라면 속고 속고 또 속아도, 또 넘어갈 만반의 준비가 갖춰져있는 호구인 것이다.
지난 두 편의 에바 극장판 국내 개봉 성적이 별로라 이번 건 개봉안 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에서는 작년 가을에 개봉한 작품인데... 그래서 심각하게 '이걸 보러 일본까지 가야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우연히 극장에 갔다가 한국 개봉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헐, 대박!'
두근 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입구를 향하던 나, 표를 받는 여직원을 보고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는...
에반게리온 Q의 포스터 시안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표를 내밀다 말고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탐난다.... 정말 갖고 싶다.... 어떻게 하면 저 티셔츠를 득템할 수 있을까?' 문득 여직원이 놀란듯 손으로 가슴을 가리더라. 허걱! 순간 너무 당황했다. '오해했구나! 중년 변태인줄 알고.' 어설프게 웃으며 상황 수습. "놀라지마세요. 제가 에반게리온 팬이라서요." 갑자기 분위기 급 악화!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 ㅠㅠ 아, 머리 허연 중년 변태의 커밍아웃이라니, 이 웬......
아내는 항상 나를 보고 뭐라 그런다. "으이그, 언제 철 들거야."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난 아마도 당분간 쉽게 철들지 않을 것 같다. 에바 포스터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에바 티셔츠를 보면 극도로 흥분하는... 응?
지난번 소개한 철환형의 책 '더 좋은 날들은 지금부터 다'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오늘은 내 생애에서 가장 젊은 날이다.'
월요일 새벽 4시 반, 아직 밖은 어두운데 일찍 잠에서 깼다. 남은 인생 중에서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다. 고로 오늘 난 젊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볼 것이다. 하루라도 더 늙기전에 오늘을 즐겨야지. 벚꽃이 핀 여의도를 걷고, 포근한 봄바람 맞으러 강변에 나가야지. 내 아까운 청춘을 위해, 오늘도 세상 눈치 안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아야겠다.
"에반게리온 큐가 온다구,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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