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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공중파 피디의 아내로 살기 참 어렵습니다

by 김민식pd 2012. 10. 22.

방명록에 올라온 사연입니다.

 

'방송사 피디의 아내입니다. 신혼인데 결혼생활이 너무 힘들어 우울증 올까 겁이 납니다.

남편은 일에 치어 집에 오는 시간은 빠르면 한 시, 보통 두 시, 아니면 네 시...

본인 힘든 건 알겠지만 저도 너무 외롭고 우울한데, 제가 힘든 건 한번도 받아주지 않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힘드시겠군요. 님의 상황이 어떨지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저 역시 신혼 초에 아내곁에 있어주지 못했거든요. 집에서 곱게 자라 자취도 한번 안해본 아내를 늘 빈 집에서 혼자 잠들게 했던 죄인이 접니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저를 보고 궁금해했죠. '무슨 일 하시길래 어떤 날은 새벽 네 시에 퇴근하고, 어떤 날은 새벽 네 시에 출근하나요?"

 

공중파 피디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절은 조연출과 피디 초년병 시절입니다. 일단 조연출 때는 내 생활에 대한 통제권이 없습니다. 연출은 낮에 촬영 다니고 촬영 끝나면 테잎을 편집실에 던져두고 갑니다. 조연출은 밤새 그 테잎을 편집해서 아침에 출근하는 연출에게 넘깁니다. 넘기고 퇴근하느냐, 아니죠. 연출이랑 같이 편집본을 시사하며 CG나 자막 의뢰를 준비합니다. 음향 효과 팀이나 음악 팀은 언제 편집본이 넘어오나 노심초사 기다립니다. 제가 빨리 작업을 마무리해야 다음 팀이 받아서 일을 할 수 있기에 쉴 여유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수백만명이 보는 방송인지라 조금이라도 준비가 부족하면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항상 일은 긴장의 연속입니다.

 

여자 피디의 남편 역시 기다림은 힘든가 봅니다. 제 입사 동기 중 여자 피디가 있는대요. 신혼 초에 늘 회사에서 밤을 샜더니, 보다못한 새 신랑이 묻더랍니다.

"밤에는 집에 와서 일하면 안돼?"

"편집기가 회사에 있잖아."

"편집기 그거 얼마 하니? 내가 한 대 사줄게."

"진짜? 나 전용 편집실 생기는 거야? 편집기는 한 대당 3천만원인데, 플레이어랑 레코더랑 2대가 필요해."

 

........ "그냥 회사에서 밤새."

 

조연출로 일하다 피디가 되고 나면 좀 사정은 나아집니다만, 바쁜 건 여전합니다. 피디가 되어 한가한 사람은 회사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연을 올리신 분의 남편이 바쁘다는 건 그만큼 잘나간다는 뜻이니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이 피디인데 프로그램을 맡지 못해 늘 집에서 같이 딩굴거리면, 부부가 함께 우울증이 올 걸요?

 

공중파 피디들에게도 애환이 있습니다. 모 방송사 여자 피디들의 경우, 미혼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미혼 남녀 커플 만들기'를 연출하는 피디가 정작 자신은 일하느라 연애도 못하는 경우도 있었구요. 어떤 자리에 피디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니 이혼율이 50%가 넘더라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있습니다. 일과 가정의 조화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거죠.

 

글을 쓰다보니 님의 입장을 헤아리기보다 남편의 입장을 변명하는 글이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제 결혼 생활도 신혼 초가 분명 위기였습니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된 건 첫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죠. 밤에 혼자 저를 기다리며 외로워하던 아내에게 결혼 3개월 만에 큰 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밤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다 잠이 들었어요. 이젠 저를 기다릴 이유가 없는거죠. 곁에 더 소중한 사람이 생겼으니까요. 물론 남편의 입장에서는 이게 또 나중에 서운해집니다. 아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뒷전에 밀리는 게 아닌가 하는...

 

 

(저의 가정을 구해준 수호천사, 첫째딸 민지의 어린 시절 모습입니다. ^^

보기만해도 마구마구 행복해지는 아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법을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가는 것이거든요. 그때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면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기보다 스스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죠. 마리오 푸조의 '대부'라는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마피아 두목이 된 남편을 둔 아내가 마지막에 선택한 것은 신앙에 귀의하는 일입니다. 남편을 비로소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동정하고, 그를 측은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 소설의 엔딩이죠. 피디가 조폭이라는 얘기는 아니고요. 저희도 그만큼 불쌍하다는 거죠. 과로사로 죽은 피디들 여럿 봤습니다. 저 역시 하루 2~3시간 자면서 며칠 연속으로 밤을 새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내 목숨을 팔아 돈 버는 사람이구나..."

 

마냥 남편을 기다리는 본인의 처지도 안쓰럽겠지만 '우리 남편도 참 불쌍하구나...' 이렇게 생각해주세요. 술마시고 들어오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하루 하루 긴장의 연속이라 술이 아니면 풀 수 없는 경우도 있거든요.

 

예전처럼 평균수명이 60대일 때랑 달리 이제는 90까지도 사는 세상이잖아요? 결혼하면 60년을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그 60년 중 바빠봤자 10년이에요. 40대가 되면 여유가 생깁니다. 한국 사회에서 30대는 누구나 바쁘고 힘든 시기거든요. 지금 이 순간을 슬기롭게 넘긴다면 여유로운 삶이 기다립니다. 조금만 더 버티시면 삼식이를 얻게 될 겁니다. ('삼식이', 은퇴 후 삼시 세끼 집에서 챙겨먹으려는 남편. '우리집 화상'의 다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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