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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굴한 인생이 쿨 하다.

by 김민식pd 2012. 7. 13.

나는 드라마 피디다. 피디는 PD, P는 프로듀서 producer, D는 디렉터 director의 줄임말이다. 과연 그럴까?

 

Producer,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라니, 턱도 없는 소리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만드는 사람이 피디다. 작가가 대본을 쓰고, 배우가 연기를 하고, 카메라감독이 촬영을 해야 드라마 한 편이 만들어진다.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Director, 사람들에게 일을 지시하는 감독이다? 미안하지만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은 다 자기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10년 이상 대본을 써 온 작가에게 대사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고, 수 십 년을 연기만 고민하며 살아온 배우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고, 평생 뷰파인더만 들여다본 카메라 감독에게 앵글이 이러니저러니 할 수도 없다.

 

그럼 피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감독님이라 불리는 직업이 또 있다. 바로 축구 감독, 야구 감독이다. 한글로는 똑같은 감독인데 영어로는 director가 아니라 coach.

 

코치란 무엇인가? 어떤 일을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모아, 그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벤치에서 응원하는 게 코치의 일이다. 히딩크 감독을 보라. 그가 박지성보다 더 공을 잘 차는가? 아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공을 잘 차는 사람을 선수로 기용하고, 그들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돕는다.

 

드라마 감독도 마찬가지다.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대본을 맡기고, 나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에게 배역을 맡기고, 나보다 촬영을 잘하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맡기는 것이 드라마 피디의 일이다.

 

내가 일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대본을 읽고 좋은데요?’를 외치고, 연기를 보고 좋은데요?’를 외치고, 앵글을 보고 좋은데요?’를 외친다. 나의 연출은 거저먹는 연출이다.

내가 먹고 사는 이유는 하나다. 나보다 잘난 작가나 배우, 스태프들을 주위에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의문점이 들 것이다. ‘드라마 감독이 원래 다 저렇게 비굴한가?’

카리스마 넘치는 피디도 많다. 촬영장에서 대본을 직접 뜯어고치며 일하는 연출, 배우에게 세밀한 감정 하나 하나, 동선 하나 하나까지 일러주는 연출, 카메라 위치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연출, 등등 폼 나게 일하는 선배도 많다.

 

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는 드라마는 공동 창작이라 믿는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 타이피스트가 아니다. 배우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지 인형이 아니다. 카메라 감독은 스스로 앵글을 만드는 아티스트지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다.

 

작가와 주도권 싸움 하느라, 배우와 힘겨루기 하느라, 스태프들과 기 싸움 하느라, 내 소중한 시간을 죽이고 싶지 않다. 알량한 연출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작품을 함께 만드는 이들의 소중한 열정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자존심의 용도에 대해서는 아내와 연애 시절에 이미 깨달았다.

신입생 환영회 때 나는 아내에게 첫눈에 반했고, 아내는 나를 보고 필리핀에서 온 교환학생이라 단정 지었다. 죽자 사자 좋다고 쫓아다니는 내게 아내가 화를 버럭 냈다. “내가 그렇게 싫다고 했는데, 선배는 자존심도 없어요?” 딱 한마디 했다. “자존심? 그건 없어도 살 자신 있는데, 너 없이는 살 자신이 없어서 그래.” 그 한마디로 나는 아내를 얻었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자존심 따위는 버려도 좋다. 비굴하다고? 굴한 인생이 쿨하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비굴할 수 있다.

더 좋은 대본을 위해서는 고집스런 작가에게 애교 떨 수 있고, 더 좋은 캐스팅을 위해서는 출연을 고사하는 여배우 앞에서 무릎 꿇을 수 있다. 그게 연출이다. 아직 비굴해지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이유는 하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무엇을 찾지 못한 탓이다.

 

나는 오늘도 내가 사랑하는 작품을 위해, 세상 앞에 기꺼이 무릎 꿇는다.

 

 

 

월간지 '행복한 동행'에서 '김피디 가라사대'라는 칼럼 연재를 시작했어요.

오늘은 그 첫번째 글을 옮깁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저는 따님들과 주말 동안 봉사 모드 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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