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직업이 드라마 연출이라 모니터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올 초 파업을 시작하고 난 후, 드라마를 보면 자꾸 촬영 현장이 떠오르고, 일하고 싶고, 그래서 TV를 일부러 피했다. 그러다 다들 '추적자'가 난리 났다기에 한번 봤다가 금방 끄고 말았다. 정말 잘 만든 드라마인데, 나한테는 너무 무서운 드라마였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경찰이 출동하고, 검찰이 동원되고, 정치권이 움직이는 걸 보니 너무 두려웠다. 구속영장에 가압류에 시달려온 내게 추적자는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드라마를 보는 게 그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결국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응답하라 1997'을 봤다. 그리고 내 속의 뭔가가 무너져내렸다. '아, 좋겠다. 누군가는 지금도 즐거운 촬영현장에서 이렇게 재미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구나.'

 

누군가는 1997년을 누군가의 팬이었던 시절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1997년을 그 팬들로 인해 바빴던 한 해로 기억한다. 1996년 MBC 입사해서 맡은 첫 프로그램이 '인기가요 베스트 50'이었다. 막내 조연출이 맡은 가장 큰 임무가 생방송 무대 질서 유지였다. HOT와 젝스키스의 양대 팬클럽이 맞붙는 날이면 나는 무대 앞에서 혹시 사고가 나지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수시로 일어나 풍선을 흔들어 카메라 앵글을 방해하는 여자아이들을 앉히고 걸핏하면 자리 다툼을 하는 팬들을 떼놓느라 목이 쉬곤 했다.

 

연출로 16년째 즐겁게 사는 원동력이 1997년의 인기가요라고 생각한다. 비록 극성팬들로 인해 일은 조금 고달팠지만, HOT, 젝스키스, DJ DOC, 지누션 등의 흥겨운 무대를 코 앞에서 볼 수 있어 매일 매일 즐거웠다.

 

요즘 1990년대 초반을 회상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유독 많이 나온다. 응답하라 1997은 그중 가장 잘 만든 TV 상품이다. 드라마를 한번도 해보지 않은 예능 작가와 예능 피디가 이런 놀라운 드라마 데뷔작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전율한다. 긴장되고 두렵다가고 한편으로는 '그래, 이래서 세상이 재밌는거야!'라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반전이 있어야 재밌고, 세상은 역전이 가능해야 즐겁다. 어떤 분야가 진입장벽이 너무 높아 새로운 시도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 분야는 곧 도태될 것이니까.

 

1997년을 즐겁게 회상할 수 있는 이유? 이제는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사를 하나의 시점으로 나눈다면 그 계기는 1998년 IMF다. IMF이후, 고용 안정성이 사라지고, 명퇴와 정리해고가 시작되면서 우리의 삶에서 낭만은 사라졌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임금이 올라가고 소비가 활성화되면서 10년간 소비자와 기업은 동반성장하며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1998년의 IMF 이후, 기업 활동을 장려한다는 명목에서 노동 시장이 유연해지고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덫에 빠지고 말았다. 

 

요즘 사회에서 묻지마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역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인생에 답이 없다고 느끼는 탓이다. 그런 점에서 우린 IMF 이후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희망은 무엇일까? 그 시절을 추억하며, 그때는 낭만이 있었지, 하며 복고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IMF가 망가뜨린 고용안정성을 이제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침에 여의도역을 나오다 골든브릿지 파업 조합원들이 돌리는 전단지를 받았다. 쌍용차, 한진 중공업 등의 정리해고 사태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정리해고,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우리 사회 모두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내용이다. 한번 고용 시장에서 아웃되면 두번다시 회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 희망은 없으니까. 

 

'응답하라 1997'을 보며 나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낭만이 있고, 여유가 있고 무엇보다 노동의 희망이 있던 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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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z lisw 2012.08.24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ㅠㅠ 눈물나요. 엉엉.

  2. 2012.08.24 1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김하연 2012.08.24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이 드라마를 아직 본적이 없는데요. 언론에 나오는 기사만 봐도 정말 공감이 많이 갑니다. 피디님이 소란스러운 여고생을 조용히 시키느라 수고하셨을때, 제가 딱 여고생이었거든요. 이 드라마의 배경인 부산출신이구요. 97년에 고등학교 1학년 이었던 저와, hot 팬이었던 제 친구, 젝키 팬이었던 다른친구. 그리고 그 둘의 은근한 신경전을 중재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요. 그리고 그 이후 imf도 정말 믿을수가 없어요. 친구들의 아버지가 실직하고, 사업이 부도나고 , 그래서 부모님이 이혼하는 친구들이 생기고, 매일 자살뉴스가 메인을 장식한 그때.. 지금의 20대 들이 겁이 많은건, 세상에 믿을거 없다. 나만 챙겨야 살아난다 라는걸 몸소 가르친 imf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 그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요 )

  4. 젝키! 폼생폼사! 2012.08.25 0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두 팀 중에는 젝키였는데! ㅎㅎ 공감대라는 것에 가장 예민한 분들이 만든 무서운 드라마. ㅎㅎ 카리스마 은지원이 은초딩 되어 버리고 아저씨 되어 서운도 하고 위안도 받고! ㅎㅎㅎㅎㅎ 그런데 그가 드라마 속에서 다시 교복을 입으니... ㅋㅋㅋㅋㅋ 아! TV 속 그들을 향해 언니, 오빠라 부를 수 있던 시절이여! 겁 없던 10 대, 20 대 시절... X세대요, 엄지족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아저씨, 아줌마! ㅎㅎ TV 속 그들만큼 반짝이던 젊음은 이제 없네요. ㅎㅎ 저는 늙는데 제 또래의 연예인들은 대체로 여전히 20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구나란 생각도 들면서... 제 몸뚱아리에게 미안하다 말해 봅니다! ㅎㅎ 향수! 언제나 승리하죠. IMF... 공부하기도 빡빡했던 시절... 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5. 나비오 2012.08.25 1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97년에 제가 뭐 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종로에서 갈곳몰라하며 무척 방황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