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면접 때 일이다. "김민식씨, 예능 피디를 지원한 이유는?"
"저는 광대입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세 명을 웃기고, 열 사람이 모이면 열 명을 웃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기회를 주시면 수천만 시청자를 웃겨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김민식씨를 안 뽑으면?"
"그럼 다시 돌아가 친구들이나 가족을 평생 웃겨주며 살겠습니다."
그런 각오로 입사했다. 우리 시대의 광대가 되겠다는 각오로. 입사하고 줄곧 코미디를 고집하며 살았다. 드라마국으로 옮겼다고 해서 갑자기 진지해진 건 아니다. '내조의 여왕',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글로리아'까지 다 로맨틱 코미디만 연출했으니까. 노조 집행부가 되어서도 나의 역할은 광대다. 마이크를 잡고 조합원 앞에 서면 어떻게든 한번은 웃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광대의 소명이다.
조합원 업무 복귀 후, 사측에서 취하는 갖가지 보복인사와 작가 해고 등의 사태를 보며 우울해졌다. 김재철과 그 일당들의 행태를 옆에서 지켜보며 2년을 살아낸다는 것, 그 중 6개월은 파업으로 그중 6개월은 정직으로 보내며 내 속의 유쾌한 광대기질이 죽어가는 건 아닌지 심하게 우울했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싸움을 거친 후, 나는 광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현업 복귀 후, 나는 다시 코미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다 어제 책을 한 권 읽었다. 커트 보네거트의 '마더 나이트'.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선전병 역할을 한 죄로 전범 재판에 회부된 미국 첩보원의 이야기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우울한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이렇게 유쾌한 이야기가 가능한거지?' 알고보니 커트 보네거트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며 드레스덴 폭격을 직접 경험한다. 수만명의 무고한 시민이 소이탄에 불에 타버린 현장을 눈으로 목도한 사람이다. 그런 생지옥을 겪고 살아나온 보네거트는 20세기 최고의 유머 작가가 된다.
(저 얼굴에 가득한 웃음 주름을 보라! 저렇게 멋진 주름을 갖고 싶다.)
김중혁 소설가가 책 뒤에 쓴 추천사가 마음에 남는다. "키득거리며, 땅을 치며, 땅에 떨어지는 배꼽을 부여잡으며, (너무 웃겨서 터지는) 눈물을 훔쳐가며 커트 보네거트를 읽었다. 웃으면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세상을 비웃어주어야만 내가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꼼수 팀을 볼 때마다 느낀다. 가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만나고도 오히려 끊임없이 조롱을 일삼는 그들이야 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광대가 아닌가! 예전 광대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외줄타기를 했다면 우리 시대의 광대는 감옥 담장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생각해보면 데뷔작 '뉴논스톱'에서 짠돌이 양동근과 억척 또순이 박경림의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즐거웠던 이유는 가난했던 20대, 몸에 배인 나 자신의 짠돌이 습성 덕분이었다. 그래, 광대라면 오히려 시련에서 웃음을 길어낼 줄 알아야 하는 데, 이 정도 싸움으로 광대가 웃음을 잃어버린다면 진짜 광대가 아닌거지. 이렇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는 것은 제대로 된 코미디 연출가로 만들기 위한 운명의 배려일지도 몰라! 나를 더욱 큰 코미디 피디로 만들어줄 새로운 시련에 도전해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광대의 길이니까.
다시 한번,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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