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사라의 한국어 학습기
(김민식 주:
재미있게 읽고 계신가요? 3부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숨어있던 한국어를 깨우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소개됩니다. 요즘 저는 50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기나긴 노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좋은 삶의 기준에 대해 고민하며 지내는데요. 사라님의 이야기가 제게는 멋진 자극이 되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소개할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3부로 이어 갈게요.)
페이스북에서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친구들에게 한국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가장 먼저 친구가 되었던 지윤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정말 좋은 책을 소개해 주었다. 덕분에 미국에서도 한국 책을 주문할 수 있는 온라인 서점까지 알게 되었다. 나는 곧바로 그 책을 주문했고, 손에 넣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 뒤로는 그 서점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아마 서점 직원들은 궁금했을 것이다. '도대체 오하이오에 사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한국 책만 계속 주문하는 걸까?' 좋은 책을 추천받을 때마다 나는 읽고 싶은 책 목록을 하나씩 늘려 갔다. 문법은 이미 충분히 익숙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어휘였다. 그래서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만든 어휘 학습 교재를 구입했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가운데 가장 평판이 좋은 책 중 하나였다. 나는 매일 조금씩 꾸준히 공부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교재 속 영어 번역에서 여러 군데 오류와 어색한 표현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번역을 마지막으로 검토한 사람이 영어 원어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후에도 한국 책의 영어 번역본을 읽다 보면 비슷한 경험을 자주 했다. 뜻은 대체로 맞지만, 원어민이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표현들. 심지어 원문의 의미를 흐리게 만드는 번역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책을 영어로 출판할 때는 반드시 영어 원어민이 최종 교정을 맡아야 한다.
하지만 결국 어휘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따로 있었다. 많이 읽는 것.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가능하면 한국어 책만 읽자. 영어 책들아, 미안! 그러던 중 TOPIK(한국어능력시험)이라는 시험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험이다. 한국 유학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주로 응시한다. 시험은 TOPIK I과 TOPIK II로 나뉘며, 읽기, 쓰기, 듣기 능력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평가한다. 미국 전역의 도시에서 시행되는 그 시험을 나도 한번 응시해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공부하거나 일할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나 자신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도 할 수 있다.' '예전의 실력이 아직 남아 있다.' 그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시험 대비 문제집도 사고,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에게 무엇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한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깨달음은 내 한국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한층 더 키워 주었다.
그 무렵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바로 한국 유튜브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전까지 나는 유튜브에도 한국어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흥미가 생기는 영상은 닥치는 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팟캐스트도 한국어로 있을까?' 그것은 거대한 세계의 입구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한국어 팟캐스트가 있었고, 나는 그 가운데 몇 개를 골라 꾸준히 듣기 시작했다. 역시 내가 가장 끌렸던 분야는 책과 한국 역사였다. 특히 한 프로그램은 스스로를 '역사 이야기꾼'이라고 소개했는데, 나에게는 그보다 더 매력적인 표현이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게 된 한국 팟캐스트는 단연 <내가 빌린 책>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두 친구가 매주 전화로 나누는 대화를 녹음한 방송이다. 각자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을 소개하고, 저자와 내용을 정리한 뒤 자신만의 감상을 나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근 다녀온 여행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중 한 사람인 김민식 피디님은 작가이자 강연자로, 한국은 물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자주 여행한다. 하지만 내가 이 팟캐스트를 좋아한 이유는 책이나 여행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삶으로 흘러갔다. 인생에서 느끼는 고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사회에 대한 바람,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 책과 여행은 단지 대화를 시작하는 계기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늘 자연스럽게 더 깊은 이야기로 들어갔다. 그들의 대화에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인생의 답은 결국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배움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 평생 공부하는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 그것은 오랫동안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온 한국 문화의 한 단면처럼 느껴졌다. 미국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오히려 미국 사회에는 지성을 가볍게 여기거나 학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나는 어려서부터 한국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평생 배우는 삶의 가치를 익혔다. 게다가 원래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러니 내가 이 팟캐스트를 매주 기다리며 듣게 된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팟캐스트가 오늘 이야기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정확히 언제부터 듣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1년, 어쩌면 2년은 넘었을 것이다. 어느 날 방송에서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 공개 녹음을 해 보면 재미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그런 날이 온다면 꼭 가 보고 싶다.' 마치 TV 공개방송 방청객이 되는 기분일 것 같았다. 그리고 몇 달이 흘렀다. 딸 엘리자베스와 함께 한국 여행을 계획하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우리가 한국에 있는 동안 정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선뜻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괜히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부담을 드리는 건 아닐까. 몇 주 동안 망설였다. 그러던 중 유튜브 채널 소개란에 적혀 있는 이메일 주소를 발견했다. 메일을 보낼까, 말까. 계속 고민했다. 결국 용기를 냈다.
나는 한국어로 짧은 메일을 보냈다. 4월에 한국을 방문하는데 혹시 공개 녹음 계획이 있다면 방청할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사실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요즘은 메일을 보내도 답이 오지 않는 일이 흔하니까. 그런데 며칠 뒤 놀랍게도 답장이 도착했다. 박 선생님이었다. 아쉽게도 공개 녹음은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대신 함께 점심을 먹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해 주셨다. 그렇게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몇 차례 연락을 나눈 끝에 4월 21일 월요일 점심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두 분 모두 메일을 함께 받아 보고 있었지만, 실제로 답장은 대부분 박 선생님이 보내 주셨다. 그러다 약속 며칠 전, 김민식 피디님도 메일에 참여했다. 식사 취향을 물어보며 오전 11시에 선릉역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점심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식당이 붐비기 때문이었다.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사실 선릉이 서울 어디쯤 있는지도 몰랐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야 네이버 지도를 열어 시청 근처 숙소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약속 당일, 엘리자베스와 나는 여유 있게 출발했다. 선릉역은 지하철 2호선, 한강 남쪽에 있었다. 10시 45분쯤 도착해 약속 장소인 출구 앞 인도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서는 순간 벽에 기대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 본 적도 없었지만 '저분이 김 피디님이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다가갔다. 그런데 피디님은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한 듯했고, 심지어 낯선 외국인 두 사람이 갑자기 다가오는 것이 의아했던 모양이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가 미국에서 온 백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글로 이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우리를 중국에서 온 손님으로 생각하고 계셨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눈앞에 백인 두 사람이 나타나 말을 거니 처음에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자기들이 메일을 주고받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김 선생님은 무척 놀라면서도 기뻐하셨다. 나는 엘리자베스를 소개했고, 우리는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인사를 나누었다. 김민식 피디님의 영어는 놀라울 만큼 자연스러웠다. 발음도 훌륭했고, 표현도 매우 세련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들어 본 한국인의 영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수준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박 선생님을 기다렸다.박 선생님이 모퉁이를 돌아 나타나자 피디님은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분들이 미국 분인 거 알고 알았어?" 박 선생님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었죠. 몰랐어요?" 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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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빌린 책>의 두 진행자를 만나러 미국에서 날아온 사라, 우리의 즐거운 만남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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