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이 40에 결심했어요. 이제 술을 멀리하고 살리라.
20대 치과 영업사원 시절, 술 마시는 일이 참 괴로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술 자체보다 술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 괴로웠어요. 때는 바야흐로 1993년. 신입사원에게 회사란 직장이 아니라 일종의 신병 훈련소 같은 곳이었습니다. 영업사원이 새로 들어오면 상사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치과 학회 임원 원장님들을 소개해주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런 분들과 인연을 맺어야 영업도 잘할 수 있으니까요. 새로 들어온 세일즈맨이라고 인사를 드리면 반갑다며 잔에 술을 가득 따라주십니다. 고객이 주는 술을 거절할 수는 없지요. 넙죽 받아 마십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상사가 또 잔을 채웁니다. 그것도 넙죽 받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규칙이 하나 있습니다. 주는 술은 다 마셔야 하지만 고객이나 상사보다 먼저 취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직장인은 간으로 일하고 정신력으로 버티는 사람들이었어요.
접대는 절대 1차로 끝나지 않아요. 그럼 섭섭하지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시작된 음주는 2차까지 이어지고요. 2차가 끝나고 원장님들이 돌아가시면 집에 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 영업 사원들끼리 3차를 갑니다. 접대만 하고 집에 가면 잠이 안 와요. 바짝 긴장한 상태로 저녁을 보냈기에 교감신경은 F1 경주차 엔진처럼 과열된 상태입니다. 이제 세일즈맨끼리 3차를 갑니다.
상사는 술을 마시며 신입을 앉혀놓고 인생 조언도 하고 훈계도 합니다. 본인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일지 몰라도 신입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를 적립하는 시간이지요. 결국 1차도 스트레스, 2차도 스트레스, 3차도 스트레스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스트레스를 추가 구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은 없을까요? 있어요. 동기들끼리 술을 마시면 됩니다. 신입사원끼리 모이면 술이 술술 넘어갑니다. 그날 만난 진상 고객 이야기, 황당한 사건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상사 이야기. 세상 모든 조직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상사 뒷담화지요. "아니, 글쎄 그 인간이 말이야..." 이 말이 시작되면 안주가 따로 필요 없습니다. 씹기 정말 좋은 소재가 있으니까요. 동기가 없다? 학교 후배들을 불러 모읍니다. 월급 탄 기념으로 내가 살게!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술을 삽니다. “직장 생활은 말이야~” 그렇게 술은 업무 영역을 넘어 취미 영역까지 진출합니다.
평일에는 일 때문에 마시고, 주말에는 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또 마십니다. 상사에게 깨진 날은 맥주를 마시고, 고객에게 깨진 날은 소주를 마십니다. 술집에서 매일 사먹자니 돈이 드니까, 이제 집에 오는 길에 가게에 들려 시원한 맥주 한 캔 사와서 혼자 마십니다. 일이 힘들수록 음주의 빈도와 강도는 점점 늘어나는데요. 문제는 술값도 함께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술값 때문에 돈이 부족해지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하면 스트레스가 늘고, 스트레스가 늘면 또 술을 마십니다. 완벽한 악순환이지요.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습니다. 분명 술을 마시면 그순간 괴로움은 잊어요. 하지만 인생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조금씩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아, 술을 마신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구나.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 마침 제가 다니던 외국계 회사에는 좋은 제도가 있었어요. 직원들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어학원 수강료를 지원해주는 제도였지요. 학원에 등록하고 영수증을 제출하면 수강료를 돌려줍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돌려받고. 저같은 짠돌이에게는 최고의 복지였어요.
수강료 지원에는 조건이 있어요. 출석률 80% 이상. 그 순간 깨달았어요. ‘이거다!’ 괴로운 술자리에서 빠질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영어학원 가야 합니다." 회사에서 권장하는 자기계발인데 상사도 함부로 말릴 수 없습니다. "그래, 민식 씨. 살살해." 재미있는 건 정작 영어 공부가 필요한 동료들은 영어학원에 다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영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퇴근 후 영어학원은 술자리보다 더 큰 고문일 수 있거든요. 하지만 저는 영어 공부를 즐기는 편이었어요. 학원에 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선생님이 통역을 시키면 마음껏 잘난 척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람은 역시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할 때 행복합니다.
학원에서 두 시간 동안 통역 수업을 받고 나오면 머리가 맑아졌어요. 영어가 잘 들리고, 입에서도 술술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밤에 잠이 잘 왔습니다. 알코올 때문에 자다가 깨는 일도 없고요. 다음날 아침에 숙취로 고생할 일도 줄었어요. 술 마시는 습관을 영어 공부하는 습관으로 바꾸자 인생이 더 편해졌어요.
지금 돌아보면 제 인생의 은인이 두 분 있습니다. 한 분은 저를 무던히도 괴롭히던 직장 상사입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이 사람 밑에서 계속 일하다가는 명이 짧아지겠다.' 결국 저는 사표를 냈습니다. 또 한 분은 통대 입시반 선생님입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저를 붙잡고 말씀하셨습니다. "김민식 씨, 통역대학원 한번 준비해볼 생각 없어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그 한마디 덕분에 평생 세일즈맨으로 살 각오를 다지던 저는 사표를 내고 외대 통역대학원 입시 준비를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를 괴롭힌 상사도, 저를 격려한 선생님도 모두 제 인생의 은인이었지요.
모든 습관은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술도 그렇고, 야식도 그렇고, 스마트폰도 그래요. 내가 의지가 약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나쁜 습관이 있다면, 먼저 나를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어요. “아, 내가 많이 힘들었구나. 그래서 여기에 의지하고 있었구나.” 그렇게 자신을 안아주는 것이 시작이고요.
살다 보면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2015년 회사에서 저를 송출실로 쫓아냈을 때가 그랬고요. 2020년 명퇴하고 나왔을 때가 그랬어요. 그런 시기에 자칫하면 우울이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왜 나는 이 지경일까? 자기 비하와 자책이 이어지기 쉬워요. 그럴 때 저는 새로운 습관을 만듭니다. 몸을 움직여봅니다. 2015년에 저는 서울 둘레길 완주에 도전했고요. 2020년 명퇴 후에는 탁구라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했어요.
가만히 있으면 머릿속에 온갖 망상이 떠오릅니다. 그 망상의 끝에 있는 칼날은 늘 나를 향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일단 몸부터 움직입니다.
걸어요.
뛰어요.
탁구를 쳐요.
자전거를 탑니다.
몸이 힘들어지면 신기하게도 머리는 조용해집니다.
젊을 때는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어요. 지금은 운동으로 풉니다. 술을 마시면 다음 날 통장이 가벼워지고, 운동을 하면 몸이 가벼워집니다. 술을 마시면 숙취가 남고, 운동을 하면 근육통이 남습니다. 둘 다 아프긴 한데, 저는 이제 근육통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마흔에 술을 멀리하기로 결심한 건 금욕을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술보다 더 재미있는 걸 찾았기 때문입니다. 저녁 시간의 독서가 그랬고, 새벽 시간의 글쓰기가 그랬고, 주말 오전의 운동이 그랬습니다.
술을 끊으려고 애쓰기보다 술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아보세요.
제 경우에는 그 덕분에 통역사가 되었고, PD도 되었고, 작가도 되었고,
지금은 밤 9시만 되면 잠이 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갔는데, 요즘은 저녁 9시면 졸려서 비틀거립니다.
비틀거리며 조금씩 성장하는 삶을 꿈꿉니다.

(사진은 포르투갈 리스본 여행하다 찍었어요. 한 달간 포르투갈/스페인 여행하며 매일 2만보에서 3만보를 걷습니다. 꾸준히 걷고 읽고 쓰면서 다니고 있어요. 건강한 평생 루틴을 이어가는 게 소원입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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