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일정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돌아봤습니다. 4박 5일 동안 세비야에서 머물며 세비야 대성당에 갔어요.

성당 중앙에 있는 거대한 황금 제단을 보며 압도되는 기분이었어요.

황금빛 성인상과 화려한 조각들.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찬란합니다. 문득 궁금해졌어요.

"이 많은 황금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황금 제단 옆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관이 있어요. 왜 세비야 대성당에 콜럼버스의 관이 있을까?
며칠 전 리스본을 걷다 발견기념비를 보았습니다. 테주 강변에 우뚝 선 거대한 기념비. 맨 앞에는 엔히크 항해왕자가 서 있고, 그 뒤로 수많은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 선원들이 뒤따르고 있어요.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기념비를 통해 대항해 시대를 기념합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작은 나라가 바다를 통해 세계를 연결했기 때문이지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브라질에 도착하고, 향신료 무역을 장악했습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포르투갈이 시작한 대항해 시대의 결과물입니다. 항해술의 발전, 정확한 지도 제작, 개량된 선박, 천문 관측 기술. 수많은 사람들의 축적된 지식과 기술이 있었기에 1492년 대서양 횡단이 가능했으니까요. 그리고 그 항해가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에게는 발견이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이었지요. 이미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거든요. 멕시코에는 아스테카 제국이 있었고, 남아메리카에는 잉카 제국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황금입니다. 아스테카인들에게 황금은 신성한 장식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에게 황금은 곧 돈이었지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상륙합니다. 아스테카 황제 모크테수마를 인질로 잡고요. 신전과 궁전에 있던 황금 장식들을 녹여져 금괴로 만듭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문명의 예술품이 단순한 재산으로 바뀌어 버렸지요. 결국 아스테카 제국은 멸망합니다. 만약 아스테카 인들이 번쩍이는 황금을 숭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황금을 숭배했기에 수백년간 황금을 모았고요, 그렇게 모은 황금은 금괴가 되어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의 손으로 흘러갑니다.
아메리카는 스페인 침략자의 눈에 황금의 땅이었어요. 원주민들에게서 황금을 빼앗고 나니 남은 건 땅이죠. 광대한 토지. 비옥한 농장. 끝없이 펼쳐진 열대 기후. 유럽인들은 그 땅에 농장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문제는 노동력이었지요. 원주민들은 천연두와 홍역 같은 질병으로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전쟁과 강제노동도 인구 감소를 가속화했지요. 농장은 늘어났지만 일할 사람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립니다. 바로 아프리카.
대서양 노예무역하면 악명 높은 포르투갈 노예상 이야기가 떠오르는데요. 가장 먼저 아프리카 해안에 진출한 나라가 포르투갈이기 때문에 그래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아프리카와 매우 가깝습니다. 지브롤터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이 14km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이 노예 무역을 선점할 수 있었지요.이후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도 뛰어들고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약 1,25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강제로 대서양을 건넜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물론 역사는 단순하지 않아요. 일부 아프리카 왕국들도 노예무역에 참여했습니다. 전쟁 포로를 유럽 상인들에게 판매했고, 그 대가로 총기와 직물, 술을 받았다고 해요. 그러나 거대한 국제 무역망을 만들고 막대한 이익을 얻은 주체가 유럽의 상인과 선주, 식민 정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농장에서 재배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설탕. 담배. 카카오. 커피. 면화.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빵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쌀처럼 배를 채워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불태우는 대상이지요.
설탕은 달콤하고, 커피는 정신을 깨우며, 담배는 중독적이고, 카카오는 초콜릿이 되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유럽의 귀족들이 즐겼고요. 부자들이 하는 건 곧 모든 사람이 따라 하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도 기꺼이 비싼 돈을 내고 그것을 삽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곤 해요.
저는 지독한 짠돌이입니다. 소비를 극단적으로 싫어하는데요. 어려서 책을 읽는 건 참 좋아했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보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무수한 나라와 다양한 역사 속 인물을 만날 수 있어요. 그럼 내 안에서 욕망이 싹틉니다. 언젠가 나도 저곳에 가보고 싶다. 소비에 대한 욕구는 없지만, 경험에 대한 욕망은 큽니다. 독서로 간접경험을 하고, 여행으로 직접 경험을 합니다.
여행 와서 소비는 극단적으로 줄입니다. 플라멩코의 고향 세비야까지 와서 플라멩코 공연 티켓은 사지 않았어요. 25유로. 1인당 5만원이라는 가격이 부담스러워 스페인 광장에서 하는 버스킹 무대로 대신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돈을 아껴도 세비야 대성당과 알카자 티켓은 살 수 밖에 없지요. 알카자 티켓으로 무료 관람할 수 있는 곳 중에 파비올라 콜렉션이 있어요.

화려한 18세기의 스페인의 문화를 묘사한 풍속화를 보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이 유난히 담배를 많이 피우고 있었어요. 거리의 남자도, 카페의 손님도, 심지어 여성들까지. 왜 그럴까요?
19세기 세비야는 유럽 최대의 담배 산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유명한 오페라 Carmen의 주인공 카르멘도 바로 세비야 담배 공장 노동자입니다. 당시 세비야 사람들에게 담배는 오늘날의 커피와 비슷한 존재였습니다. 일상의 기호품. 사교의 매개체.삶의 여유를 상징하는 물건.
그 담배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대부분 신대륙의 농장에서 재배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농장의 상당수는 노예 노동에 의존했습니다. 화가가 그린 낭만적인 풍경 뒤에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역사가 숨어 있었던 셈이지요.

다시 세비야 대성당으로 돌아옵니다. 황금빛 제단 앞에 섭니다. 그 황금이 모두 신대륙에서 온 것은 아니에요. 제단 자체는 콜럼버스 이전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세비야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멕시코와 페루의 금과 은이 세비야 항구로 들어왔습니다. 신대륙의 작물들이 세비야를 거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콜럼버스의 관이 이곳에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그가 스페인 제국의 황금 시대를 연 상징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리스본의 발견기념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세비야 대성당에서 끝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황금을 손에 넣은 나라가 오래도록 번영했는가?’
스페인은 신대륙의 금과 은으로 세계 최강 제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를 만들어내는 기술과 산업을 키우는 데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습니다. 황금은 넘쳐났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산 체계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요. 결국 제국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황금은 무엇일까요?
저는 반도체라고 생각합니다.
16세기 세비야 항구로 금과 은이 흘러들어왔다면, 21세기 한국에는 반도체 수출 대금이 들어옵니다. 과거 유럽인들이 황금을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면, 오늘날 세계의 기업들은 더 빠른 연산 능력과 더 뛰어난 인공지능을 위해 한국의 반도체를 필요로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황금도 결국 금속에 불과했고, 반도체도 결국 작은 실리콘 조각에 불과합니다.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자원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들의 지혜가 아닐까요? 대항해 시대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황금이 아니라 항해술과 지도 제작 기술이었고, 오늘날 AI 시대를 여는 것도 반도체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신대륙의 황금이 스페인 제국의 영광을 만들었듯, 반도체는 한국 주식 시장의 역사적 활황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경쟁력은 반도체를 만드는 기술을 넘어, 그 기술 위에서 새로운 산업과 문화,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을 것입니다.
500년 전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대륙 앞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황금이 제국의 흥망을 결정했다면, 미래의 황금은 기술과 지식,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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