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수달마다 해외 여행을 다니는데요. 2026년 6월은 한 달간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떠납니다. 작년 가을에 아시아나 마일리지로 바르셀로나 왕복 항공편을 끊어두었어요. 6월 2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어디부터 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챗GPT에게 물어봤어요.
"바르셀로나 여행 왔어요. 오전에 3시간 정도 걸으며 대표 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코스를 짜주세요."
답은 이랬습니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출발해 고딕 지구와 람블라스 거리, 해안 쪽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좋아요. 그럼 AI가 짜준 코스를 따라 걸어봅니다.
1. 카탈루냐 광장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카탈루냐 광장으로 향했어요. 바르셀로나의 심장 같은 곳입니다. 교통의 요지라 숙소에서도 한번에 가는 전철이 있네요. 분수와 조각상, 수많은 비둘기들이 반깁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관광객보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더 많네요. 광장 주변 백화점과 쇼핑 거리를 둘러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2. 카탈루냐 음악당

두 번째 목적지는 카탈루냐 음악당. 화려한 외관만 봐도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지 알겠더군요. 모자이크와 조각 장식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어요. 10여 년 전 이곳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 실내 장식을 보았으니 이번에는 외관만 보고 걷습니다.

3. 보케리아 시장
오전 7시 50분쯤 보케리아 시장에 도착했어요. 8시에 오픈이기에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 문을 열기 시작했어요. 아직 관광객들이 몰려오기 전이라 시장의 하루가 시작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흥미로운 건 시장 분위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통시장과는 좀 달라요. 세계적인 관광도시인지라, 깔끔하고 세련됐고, 마치 고급 식재료 백화점 같은 느낌입니다. 진열도 무척 아름답고요. 시장 옆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4. 콜럼버스 기념탑
람블라스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끝에서 콜럼버스 기념탑을 만납니다. 동상은 바다를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고요. 등을 지고 서 있는 남자가 바로 콜럼버스인데요. 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신대륙, 아메리카입니다.

항구를 내려다보며 잠시 쉬고, 바르셀로네타 해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바닷바람이 시원한데요. 부둣가에서 노숙하는 이들을 봅니다. 바르셀로나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면서, 주택 가격이 많이 올랐어요. 그래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노숙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우리가 아는 노숙자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라요. 그냥 길에서 볼 수 있는 2,30대 청년들이 노숙을 합니다. 코로나가 끝나고, 소득의 시대에서 자산의 시대로 이행했어요. 이제는 전세계 대도시에서는 돈을 벌어 집을 사기 어려워요. 그런데 또 대도시가 아니면, 일의 기회가 없고요. 어디를 가든 양극화의 상흔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5. 왕의 광장
해변 산책 후 다시 카탈루냐 광장으로 갑니다. 어차피 숙소로 가는 전철을 타려면 카탈루냐 광장역으로 가야 하거든요. 돌아가는 길에 왕의 광장에 들렀습니다. 마침 영어 가이드 투어가 진행 중이더군요. 옆을 지나가며 슬쩍 귀동냥을 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재미있어요. 이곳이 종교재판이 열리던 장소였고, 콜럼버스가 여왕을 알현했던 곳이라고요. 콜럼버스가 여왕에게 신항로 개척을 위한 투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요. 나중에 신대륙에서 돌아와 금과 은,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왔다지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지고 온 선물 중에는 매독균도 있어요. (의도치못한 선물이지요.) 당시 유럽인들이 매독을 신대륙에서 온 병이라고 여겼던 것처럼, 반대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가져온 Smallpox(천연두), Measles(홍역) 등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사람뿐 아니라 질병까지 대서양을 건너게 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고요.
가이드의 입담이 워낙 좋아서 한참을 서서 듣게 되었습니다. 발성이나 전달력이 예사롭지 않던데 아마 연극이나 무대 경험이 있는 분이 아닐까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연기자가 되지 못해도 여행 가이드로서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삶도 멋진 기회겠지요.
역사 강사로 유명한 설민석의 학부 전공은 연극영화과입니다.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했어요. 연극영화과에서 배운 발성, 스토리텔링, 무대 표현력이 그의 강의 스타일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요. 흥미롭게도 설민석 씨는 원래 사극 연출가를 꿈꿨다고 하네요. 역사 엔터테인먼트라는 장르를 만든 거죠. 저는 대학 전공을 꼭 살리지 않고도,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전공에 색다른 직업 경험이 더해지면 나만의 독특한 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어요. 1996년 통역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제가 MBC 피디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 방송일을 좀 해보고 재미없으면 나와서 미디어 전문 통역사가 되려고 했어요. 그냥 통역사는 많지만, 피디 출신 통역사는 드물거든요. 그러다 그냥 통역사 출신 피디로 눌러앉았어요. 전공과 직업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6. 바르셀로나 대성당
유럽에서 유명한 성당이 다 그렇듯, 고딕 양식 특유의 웅장함이 압도적이에요. 안에 들어갈까 고민했는데 입장료가 꽤 비싸네요. 요즘 바르셀로나 성당들은 대부분 관람료를 받는 듯합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영향일까요? 대신 성당 앞 광장 벤치에 앉아 쉽니다. 마침 거리 음악가가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어요. 웅장한 성당 건물을 무대 배경삼아 잠시 공연을 즐기고 갑니다.
7. 람블라스 거리
원래라면 거리 공연과 노천 카페,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곳이라는데요. 2026년 6월에는 하필 공사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지는 않았어요. 여행이 늘 그렇지요. 인터넷 사진과 현실이 꼭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재미있어요.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기대치 않았던 즐거움도 있거든요. 꼭 인생 같아요. ^^
8. 산타 카테리나 시장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파집니다. 시장기를 해결하는데는 시장이 최고지요. 이번에는 산타 카테리나 시장으로 가고요. 시장 노천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사람 구경을 해요. 지나가는 여행객들.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인들. 그냥 앉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9. 시우타데야 공원
요즘 새로 만든 루틴이 있어요. 밥을 먹으면 무조건 15분은 움직입니다. 집에 있다면 유튜브를 틀어 줌바 댄스를 따라하고요. 혹은 탄력 밴드 운동을 합니다. 여행지에서는 공원을 찾아가 걷습니다. 마침 시장 근처에 시우타데야 공원이 있어요.
저는 어느 도시를 가든 그 도시의 대표 공원을 찾아봅니다. 여행자들이 많은 관광 명소보다 그 도시 사람들이 쉬고 노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잔디밭에 누워 있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여기도 러닝 열풍인가요? 뛰는 사람이 엄청 많아요.)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 도시의 진짜 얼굴은 공원에 있다고 생각해요.

공원 중앙 분수대는 특히 아름다웠어요. 알고 보니 젊은 시절 가우디가 설계에 참여했다고요. 정말 바르셀로나는 도시 곳곳에 가우디의 흔적이 남아 있네요.
이제 숙소에 돌아가 잠시 낮잠을 자고, 오후에는 다시 나가 가우디 투어를 했어요.

전철 타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역에 갔어요. 전철역 계단을 나와 돌아보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아요. 웅장하고 화려한 가우디의 걸작이 우리를 반겨요. 올해는 가우디 서거 100주년 되는 해고요. 드디어 완공을 했다네요.

근처에 있는 까사 밀라 Casa Milà, 까사 바트요Casa Batlló까지 다 걸어서 보고 다녔어요. 숙소로 돌아와 보니 걸음 수가 무려 2만8천 보. 그래도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6월 초 바르셀로나는 생각보다 선선했습니다. 섭씨 25도 정도였어요. 폭염을 걱정하는 이도 많았지만, 걱정할만큼 무덥지는 않았어요.

걷기 좋은 날씨. 걷기 좋은 거리. 그리고 어디를 봐도 아름다운 건물들. 그래서 자꾸만 걷고 싶은 도시, 바르셀로나. 오늘의 바르셀로나 산책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올해 완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다음에 다시 소개할게요. 은퇴자의 세계일주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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