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걷기에 진심입니다. 도보 여행을 정말 좋아해요. 여행을 많이 다니지만, 시티 투어 버스를 타지 않아요. 전철 1일권도 잘 이용하지 않습니다. 입장료를 내는 곳도 잘 안 가요. 딱 한 곳을 기점으로 삼아서 그곳을 중심으로 3시간 정도 걸으며 도시의 풍광을 즐깁니다. 돈은 안 쓰고, 몸만 쓰는 여행. ^^
리스본에서도 3시간 걷기 여행을 했어요. 챗GPT가 추천한 코스가 있어요. 시작은 호시우 광장, 끝은 상 조르즈 성.
"3시간 정도 걸으면 됩니다."
AI의 말을 믿었지요. 3시간 뒤 깨달았습니다. AI는 거리를 계산할 줄은 알지만, 제 다리 근육 상태까지는 계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60에 가까운 나의 나이를 고려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낼모레 환갑이라니 환장하겠네. ^^) 그래도 덕분에 리스본의 매력을 제대로 만났어요.

1. 호시우 광장
여행은 리스본의 심장, 호시우 광장에서 시작합니다. 전철역이 있어 접근성이 좋아요. 광장에 가면 흑백 물결무늬 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바닥이 마치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느낌이에요.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재미난 디자인이네요. 포르투갈 사람들은 대항해 시대에 바다를 지배하더니, 광장 바닥까지 파도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리스본은 어디를 가나 바닥에 돌로 무늬를 만들어두었어요. 동네마다 다른 바닥 디자인을 보는 재미가 있네요.

2.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
호시우 광장에서 걸어서 5분 거리. 1902년에 만들어진 철제 엘리베이터입니다. 에펠탑 설계자의 제자가 만들었다고 하니 어딘가 파리의 분위기도 느껴집니다. 2026년 6월 현재 운영은 하지 않고 있네요.

3. 카르무 수도원
기둥과 벽은 있지만, 천장이 없는 수도원입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이 남긴 흔적이지요. 무너진 채로 복원하지 않았다고 해요.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고딕 양식의 수도원. 사람은 무너진 흔적을 감추려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상처를 숨기지 않아요. 오히려 그것이 역사로 남았지요. 대항해 시대 전성기를 맞던 리스본은 대지진 때 80%의 건물이 무너지고 그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고 합니다. 자연의 힘 앞에서는 나약하기만 한 인간...
4. 코메르시우 광장
조금만 더 걸어서 내려가면 노란색 건물들이 둘러싼 광장이 나와요. 예전에는 왕궁이 있던 자리라는군요. 대항해 시대에는 수많은 배들이 이곳을 통해 세계로 나갔다고요. 물결이 치는 걸 보고 해변인 줄 알았는데 여기는 테주강의 강변입니다. 강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그래서 큰 배를 띄울 수 있었고, 이곳이 항해의 시작점이 된 거겠지요.

5. 리스본 대성당
언덕길을 따라 한참 걸으면 12세기에 지어진 대성당이 나옵니다. 화려함보다 견고함이 돋보이는 건축물입니다. 수백 년 동안 전쟁과 지진을 견디며 살아남은 건물의 힘이 있어요. 나이가 들수록 저는 화려한 것보다 오래 버틴 것에 더 눈길이 갑니다. 건물도 그렇고 사람도 그래요. 젊어서 잘 나가는 건 운이 따라야 하는데요, 나이 들어 버티는 건 꾸준한 관리와 노력 덕분이더라고요.
6. 알파마 지구
좁은 골목, 창문에 걸린 빨래, 동네 주민들의 일상. 저는 여행지에서 이런 동네를 가장 좋아합니다. 관광지도 좋지만, 현지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라는군요.
미로 같은 골목을 걷다 보면 길을 잃기도 하는데요. 그렇다고 불안하지는 않아요. 내 친구 구글 지도가 있으니까. 때로는 길을 잃어야 재미있습니다. 목적지만 찾아 점과 점을 연결하는 여행은 효율적이지만, 재미는 없습니다. 낯선 골목을 헤매는 과정도 여행이거든요. 좋은 여행은 대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시작되더라고요.

7. 산타 루지아 전망대 &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리스본을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곳. 타일 벽화. 부겐빌레아 꽃. 붉은 지붕. 그리고 테주강. 엽서 속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빽빽한 붉은 지붕들 사이로 은빛으로 빛나는 물살. 난간에 기대어 한참을 내려다봅니다.

8. 상 조르즈 성
오늘 여행의 마지막은 상 조르즈 성입니다. 입장료가 17유로라는 말에 그냥 발길을 돌릴까 했어요. 원화 가치가 내려간 탓일까요? 요즘 17유로는 3만 원 정도입니다. 예전보다 많이 올랐어요. 흠. 잠시 고민하다 티켓을 샀는데요. 음. 돈이 아깝지는 않아요. 언덕 위에 자리한 성곽에 오르면 리스본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고요. 그 옛날 무어인들이 쌓은 성을 빼앗은 전쟁의 기록과 이후 포르투갈의 전성기를 함께 한 유적을 볼 수 있어요. 대단한 요새입니다.
성 안에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리스본 시내를 관찰할 수 있는 곳도 있어요. 시간이 맞는다면 영어로 진행하는 10분짜리 프로그램을 들어보세요. 저는 포르투갈 어로 설명을 들었는데 하나도 못 알아 들어서... ^^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리스본의 매력을 보여줍니다. 여기는 수직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도시에요. 언덕을 따라 층층이 쌓듯이 지어진 건물을 보는 재미가 있어요. 걷기 여행도 마찬가지. 계속 오르고 내리고 골목을 돌면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어요.
환갑을 앞둔 나이에 오르내리느라 고생은 했지만 즐거웠어요.
젊을 때는 돈이 없어서 걷고,
중년에는 건강 때문에 걷고,
은퇴 후에는 시간이 많아서 걷습니다.
결국 인생은 계속 걷는 거였네요.
다만 예전에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면,
이제는 풍경을 보려고 걷습니다.
그리고 오늘 리스본에서 깨달았어요.
세계일주에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비행기 표도, 호텔 예약도 아닙니다.
튼튼한 무릎입니다. ^^
은퇴자의 세계일주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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