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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포르투 걷기 여행

by 김민식pd 2026. 6. 17.

예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추석마다 해외여행을 다닌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상한 원칙이 하나 있었어요. "한 번 간 곳은 다시 안 간다." 저는 늘 반대했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여행하면 갈수록 손해예요." "왜?" "좋은 곳은 이미 다 가봤잖아요. 남은 건 점점 순위가 내려가는 곳들뿐인데요?" 

지금 생각해도 제 논리는 완벽했습니다. 여행지를 맛집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가장 맛있는 집부터 하나씩 가면 결국 마지막에는 '동네에서 그나마 먹을 만한 집'만 남게 되잖아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꿈쩍도 안 하셨어요. "안 가본 데를 가야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이제는 알아요. 70대 중반의 아버지에게 해외 여행은 시간이 넉넉한 취미가 아니었던 거예요. 남은 시간 안에 못 가 본 나라를 하나라도 더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죠. 반면 저는 달라요. 새로운 곳도 가고 싶지만, 좋았던 곳은 또 가고 싶어요. 좋은 책을 두 번 읽고, 좋은 영화를 다시 보고, 맛있는 식당에 재방문하듯이. 

명예퇴직 후 저는 짝수 달마다 해외여행을 다닙니다. 여행지를 고르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예전에 좋았던 곳을 다시 간다.’ 인간은 참 모순적이에요. 익숙한 곳이 좋다면서도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는 못하거든요. 그래서 절충안을 찾지요. 이번에 저는 10여년 전 가보고 좋았던 바르셀로나와 안달루시아에 포르투갈을 추가했어요.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하루를 푹 쉰 뒤 다시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로 향했어요. 사실 포르투갈은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나라였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챗GPT에게 묻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디를 걸을까요?” 전날 밤에는 '밀리의 서재'에서 여행 가이드북을 읽고, 아침에는 AI의 추천 코스를 받아 비교합니다. 
챗GPT는 이렇게 소개했어요.

"포르투에 처음 오셨다면 상 벤투역에서 출발해 포르투의 핵심 명소를 3시간 안에 둘러보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언덕이 조금 있지만 풍경이 워낙 좋아 걷는 즐거움이 큰 코스예요."

마침 숙소에서 전철로 갈 수 있는 곳이네요.

좋습니다.

오늘도 AI가 시키는 대로 한번 걸어보겠습니다.


1. 상 벤투역 (15분)

마침 숙소에서 전철로 갈 수 있는 곳이네요. 


어디에서 출발하던 포르투 여행의 시작점으로 딱입니다. 원래는 수도원이었는데, 기차역으로 바꾼 공간이고요. 포르투갈의 역사를 묘사한 약 2만 장의 아줄레주 타일로 만들어진 벽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2. 포르투 대성당 (20분)

걸어서 조금만 올라가면 대성당이 나오고요. 포르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 하나라는데, 성당 앞 광장에서 내려다보는 도루강 전망이 좋네요. 


3. 루이스 1세 다리 전망 (20분)

대성당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다리입니다. 포르투 최고의 전망 포인트. 도루강과 강 건너 가이아 지구가 한눈에 보이고요. 지붕에 브랜드 명 간판이 줄지어 선 포트 와인 저장고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요. 



4. 빅토리아 전망대 (15분)

전망대로 가다 노란 우산을 든 Free Walking Tour Guide를 만났어요. 마침 영어로 진행하는 도시 투어라네요. 그분을 따라 다니며 온갖 이야기를 듣습니다. 법원 건물 앞에서는 포르투갈의 역사 이야기를 듣고, 옛 유대인 지구 골목에서는 수백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요.

클레리구스 탑을 올려다보고, 쌍둥이 교회의 화려한 타일 벽화를 구경하고, 대학교 앞 광장을 지나갑니다. 해리 포터에 영감을 주었다는 렐루 서점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어요. 한참 투어를 하던 가이드가 배가 고파 잠시 당보충을 해야겠다며, "잠깐 맥도날드에 들러도 될까요?" 합니다. '응? 투어 중에?' 알고보니 포르투 시내에 있는 맥도날드 Imperial은 1932년에 만들어진 카페에 자리 잡은 곳인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날드라는군요. ^^

유대인 거리에서 가이드는 포르투갈 외교관 Aristides de Sousa Mendes의 삶을 소개합니다.

1940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벌어진 일인데요.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수만 명의 난민들이 국경으로 몰려듭니다. 유대인, 반나치 인사, 예술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탈출할 길을 찾고 있었지요. 2차 대전 중 포르투갈은 중립을 택합니다. 그런데 포르투갈 정부는 이웃 나라인 스페인과 나치 독일의 눈치를 살펴요. 유대인들에게는 입국 비자를 내주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소자 멘드스는 고민 끝에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수천 명의 난민에게 비자를 발급합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자유 세계로 탈출할 수 있었어요. 대부분의 전쟁 영웅 이야기에는 총과 전투가 등장하지요. 하지만 멘데스는 총을 쏘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아 도장만 죽어라 찍습니다.

한 장의 비자. 한 번의 서명. 그 사소해 보이는 행위가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한 가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어떤 역사학자는 소자 멘드스를 "한 개인이 수행한 가장 위대한 구조 활동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고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쉽습니다. 침묵하는 것도 쉽습니다. 모두가 외면할 때 나도 외면하는 것은 더욱 쉽습니다. 그런데 소자 멘드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직업, 명예, 연금, 미래를 잃을 것을 알면서도 행동했고요. 결국 그는 귀국 후 직위를 박탈당하고 가난 속에서 생을 마쳤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뒤 포르투갈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기리게 되지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단순히 대항해 시대의 나라가 아니라 양심을 지킨 한 외교관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이런 한 사람이 비정한 시대에 한 나라의 품격을 지켜냅니다.

포르투 도보 걷기 여행 일정 (총 3시간)

시간 장소

09:00 상 벤투역
09:15 포르투 대성당
09:40 루이스 1세 다리 전망
10:00 빅토리아 전망대
10:20 클레리구스 탑
10:50 렐루 서점
11:30 리베이라 지구
12:00 강변 카페에서 커피.

이게 챗 지피티의 추천 일정이었고요. 프리 워킹 투어의 코스와 비슷했습니다. 예전에는 여행을 할 때 전자책으로 여행 가이드북을 참고했어요. '밀리의 서재'에서 다운로드 받아서 읽는데요. 언젠가부터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본문 복사가 되지 않아요. 책에서 본 지명을 복사해서 구글 지도에서 검색을 해야 하는데, 일일이 화면을 바꿔가며 직접 입력해야 하더군요.

요즘 저는 가이드북을 통해 도시의 전반적인 소개를 읽고요. 그런 다음 챗 GPT에게 경로를 짜달라고 합니다. 그런 후, 책에 나오는 2박3일 추천 일정 코스와 비교해보고 빠진 곳이 없나 살핍니다. 인공지능의 답변은 복사 후 메모하는 과정이 편리해서 여행기를 기록하기도 편하더라고요. 무엇보다 도보 여행을 선호하는 제 스타일을 이제 GPT가 학습했기에 제가 딱 맞는 코스를 잘 추천해주더군요. 늘 느끼지만, 여행하기에는 갈수록 더 편해지는 시대인 것 같아요. 

은퇴자의 세계일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아, 참고로 6월의 포르투는 낮에도 최고 기온 22도 정도고요. 아침 저녁으로는 꽤 쌀쌀합니다. 긴 팔, 긴 바지를 준비해가시는 걸 권해드립니다. 반팔만 입고 돌아다니다가 얼어 죽는 줄... 누가 6월에 남부 유럽은 폭염으로 고생한다고 그랬어! 포르투, 리스본, 다 쌀쌀해요. 6월에도. 경량 패딩 입고 다니는 현지인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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