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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하루에 다 보기엔 아까운 세비야 걷기 여행 코스

by 김민식pd 2026. 7. 8.

예전에는 여행을 갈 때마다 DK에서 나온 Eyewitness 가이드북을 챙겼습니다. 사진도 멋지고, 걸어서 다니기 좋은 지도가 특히 좋았거든요. 문제는 책이 너무 무겁다는 거죠. 가볍게 다니고 싶은데, 책은 거의 벽돌 수준이었어요. 한 권 두 권 모으다 보니 열 권이 넘었고, 결국 이사할 때 전부 버렸습니다.

저는 책을 모을 때는 애지중지하지만, 버릴 때는 의외로 냉정합니다. 안 그러면 집이 도서관이 아니라 창고가 되거든요.

요즘은 전자책 가이드북도 잘 안 봅니다. 제 최고의 여행 가이드는 이제 챗GPT입니다.

"세비야에서 3시간 정도 걷기 좋은 코스를 짜줘."

스페인 광장 → 마리아 루이사 공원 → 황금의 탑 → 강변 → 알카사르 → 세비야 대성당

구글 지도를 켜 보니 정말 3시간 정도 걸리더군요.

고민 없이 길을 나섭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스페인 광장.

1929년 이베로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반원형 건물과 운하, 다리, 그리고 스페인 각 지방을 상징하는 타일 벤치가 아름다운 세비야 최고의 포토존이지요.

아침 일찍 가면 사람이 적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갔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김대식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세비야까지 와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을 만나다니! 심지어 팬을 위해 이렇게 겸손한 포즈까지 취해주시다니, 감동, 또 감동!

한때는 엑스포가 시대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박람회에 가면 온 세상을 만날 수 있거든요. 지금은 유튜브가 있고, 구글이 있고, 비행기 표만 끊으면 직접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람회의 인기는 좀 시들한 듯 한데요. 작년에 간 오사카 엑스포는 인기가 뜨거웠어요. 왜 그럴까요? 일본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잘 안 가요. 여권을 소지한 비율이 20%도 되지 않는답니다. 예전과 달리 동남아나 유럽에서 일본인 여행자는 가뭄에 콩나듯 봐요. 많은 건 한국인과 중국인이고요. 인구 비율로 보면 한국이 압도적이지요. 어쨌든 예전에는 박람회가 세상 구경하는 좋은 창구였어요. 스페인에 가보면 도시마다 옛 박람회장이 있는데요. 대부분 공원이 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중인데요. 스페인 광장은 아직 현역같아요. 그곳에 가면 아직도 세상을 만날 수 있어요. 전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그곳을 채우고 있으니까.


다음은 마리아 루이사 공원입니다.

야자수와 오렌지나무가 가득한 세비야 최고의 산책길입니다. 6월 중순 오전에는 그늘만 잘 찾으면 꽤 걸을 만합니다. 원래는 왕실 소유였는데 마리아 루이사 공주가 시민들에게 기증했다고요. 자기 땅을 통째로 시민에게 내놓다니. 저 같은 짠돌이는 책 한 권 빌려주는 것도 며칠 고민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분입니다. 역시 공주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이어서 황금의 탑.

이름은 황금의 탑인데 막상 가 보면 황금은 없어요. 이름만 황금입니다. 과거 세비야가 신대륙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라고요. 강변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세비야 특유의 느긋한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세비야에서 4박 4일을 지내면서 강변 산책을 자주 했어요. 요즘 관광지는 입장료가 많이 비씨아요. 강변 산책은 돈 안 들고, 칼로리만 조금 씁니다. 짠돌이에겐 최고의 여행지지요.


다음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알카사르.

이름에서 느껴지듯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왕궁입니다. 우마이야 왕조 시절 만들어진 궁전에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더해져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지금도 스페인 왕실이 세비야를 방문하면 사용하는 왕궁이라고 합니다.

궁전도 크지만 정원이 정말 넓습니다. '조금만 보고 나와야지.' 하고 들어갔다가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시간보다 체력이 먼저 바닥... ^^


알카사르 바로 맞은편에는 세비야 대성당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 성당입니다. 과거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고, 완공까지 거의 100년이 걸렸어요. 성당 안에는 화려한 황금 제단과 수많은 예술 작품, 그리고 콜럼버스의 무덤도 있어요.

성당에 붙어있는 히랄다 탑에 올라가면 세비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워낙 높은 탑이라 말을 타고 올랐다고 하는데요. 한참 오르다보면 다리 근력 운동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



저는 첫날 알카사르를 보고, 다음날 세비야 대성당을 찾았습니다. 둘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하루에 함께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이틀에 나눠서 봤어요. 한 번에 다 보기에는 아까운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부 스페인의 여름은 정말 덥습니다.

오전에는 열심히 걷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숙소로 돌아와 에어컨을 켭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여행기를 쓰고, 다음 책 원고를 조금씩 다듬습니다. 3시에서 4시 사이, 30분 정도 낮잠을 잡니다. 스페인의 여름은 더워요. 시에스타라는 문화가 왜 생겼는지 알겠더라고요.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 먹으러 다시 나갑니다. 관광은 오전에 반나절만 열심히 하고요, 남은 시간은 여유롭게 보냅니다.



관광만 하는 여행도 좋지만, 저는 이렇게 걷고, 읽고, 쓰고, 쉬는 여행이 가장 행복합니다. 퇴직하고도 일만 하고 사는 건 억울해서, 짝수달마다 여행을 다닙니다. 한 달간 여행하면서 너무 열심히 놀면 돌아와서 몸살이 나기도 해요. 노는 것도 쉬엄쉬엄 놉니다. 그게 은퇴자의 여행법입니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황금을 보며 제가 느낀 점은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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