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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웃겨야 산다

by 김민식pd 2026. 2. 9.

개인적으로 저는 한 사람이 나고 자란 고향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스테레오타입과 전혀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 스무 살에 서울에 처음 올라온 경상도 남자지만, 전혀 경상도 남자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점이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했던 이유이기도 했어요. 말이 많다고요. ^^
보통 경상도 남자는 말이 짧다고들 하죠. 싸울 때도 “됐나?” “됐다!” 한마디면 바로 주먹이 오간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저는 말이 많았습니다.
“꼭 주먹으로 해결해야 할까? 이성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말이야. 네가 나에게 하는 게 정서적 폭력인데 왜냐하면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비하하는 건…”
퍽.
설명은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주먹이 먼저 날아왔지요. ^^

지방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다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경험은 있습니다. 코미디 PD로 일하며 개그맨들을 많이 만났는데, 의외로 충청도 출신이 참 많았다는 점입니다. 유튜브에서 ‘충청도 화법’을 검색해 보면 관련 영상이 쏟아져 나오지요. 말은 느린데, 은근히 웃깁니다. ‘전설의 충청도 화법으로 흥정하는 할머니’ 같은 영상들을 보면 왜 그런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제가 아는 충청도 사람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분 중 한 분이 바로 권석 선배님입니다. MBC의 히트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놀러와〉를 만들었고, 〈아빠! 어디가?〉와 〈진짜 사나이〉를 기획한 분이지요.

2019년쯤이었을 겁니다. “선배님, 요즘 뭐가 제일 재밌으세요?” 하고 여쭤봤더니, 선배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민식 씨, 나 요즘 퇴근하고 한겨레 문화센터 가서 소설창작반 수업 듣는데요. 정말 재미있어요.”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선배는 원래 문학청년이었습니다. 1993년 MBC에 입사해 PD로 살며 접어두었던 꿈을, 쉰이 넘어 다시 꺼내 들었고, 결국 2022년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에서 『스피드』로 대상을 받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100세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 저 역시 이제야 세계일주 여행가라는 꿈을 하나씩 실현해 가고 있으니까요.

권석 선배님의 가장 큰 경쟁력은 끈기입니다. 충청도 사람답게 느릿느릿하지만 끝까지 기다릴 줄 압니다. 예능 PD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이지요. 재미난 토크 소재가 나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힘. 그런 선배가 작정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다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두 번째 소설 『리무진의 여름』에 이어, 이번에 신작을 내놓았습니다.

〈코미디의 영광〉 (권석 / 자음과 모음)

소설을 펼치자마자, 시작부터 내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코미디 중 최고는 바로 내가 코미디언이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직업을 내게 어울리는 순서대로 줄을 쭉 세운다고 쳐보자. 맨 끄트머리에 있을 게 바로 코미디언이다. 나와 코미디언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처음부터 같이 붙여 쓸 수 없는 말이란 얘기다.’

입사 초기에 선배들이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민식아, 너처럼 진지한 애가 코미디 PD를 하겠다고? 적성에 안 맞을 텐데?”
믿거나 말거나, 저는 시트콤 PD로 일할 때 나름 꽤 웃기는 편이었습니다. 물론 저보다 더 웃긴 PD들이 훨씬 많았지요. 그래서 결국 코미디를 떠나 드라마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드라마국에서는 “웃기는 놈이 왔다”고 반겨주기는커녕, 놀리더군요. ^^ 결국 상처를 안고 나왔습니다.

요즘 저는 강연이나 유튜브 녹화를 할 때 무척 즐겁습니다. 작가치고는 꽤 웃기다는 반응을 종종 듣거든요. ‘그래, 코미디 PD로는 너무 진지했지만, 작가로서는 좀 웃기는구나. 그럼 됐지 뭐.’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삽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코미디 중 최고는 바로 내가 코미디언이었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왜 이런 독백을 할까요? 전주 최씨 문성공파, 토종 한국인 주인공이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집안의 종교 때문이었습니다. 5년째 불임으로 마음고생을 하던 어머니가 하나님과 은밀한 거래를 하지요. 아이를 낳게 해주면 제사장으로 키우겠다고. 그렇게 목사가 되는 것이 운명이라 믿고 살아온 전도사 사무엘은, 친구의 꾐에 빠져 코미디언 공채 시험에 나가게 됩니다. ‘코미디언이 되면 돈과 인기를 한 번에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말이지요.

소설을 읽는 동안, 저는 그 시절 코미디언 공채 심사를 보던 장면과 3층 로비 구석에서 신인 코미디언들이 연습하던 풍경이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과 동기들은 오랜 회의 끝에 〈풀몬티〉라는 스트립쇼 코너를 기획합니다. 무대에 나란히 서서 개그를 치고, 못 웃기면 옷을 하나씩 벗는 설정이지요. 공중파에서 바지를 벗으면 방송사고입니다. 저희 MBC 코미디 PD들에겐 트라우마가 있어요. ^^ 결국 그 코너는 까이고 맙니다.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주인공은 일자리를 잃고 택시 기사가 됩니다. 그런데 직업 정신이 어디 가나요. 가끔 손님들을 웃깁니다.
“저는 한때 코미디언이었어요.”
“근데 코미디언이 왜 이렇게 진지해요? 하나도 안 웃겨요.”
“그래서 택시 운전사가 됐잖아요.”
그 말에 승객이 웃습니다.

‘하루 한 사람 웃기기. 오늘도 성공이다. 코미디언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여전히 시도 때도 없이 남을 웃기려고 한다. 아무도 웃기지 못한 코미디언의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 정체성은 여전히 코미디 PD입니다. 가장 오랜 시간 월급을 받고 했던 일이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강연을 나가면,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웃기려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웃기는 일이다.’

소설 속 구절인데, 깊이 공감합니다. 제가 살 길 역시 남을 웃기는 데 있습니다.
소설에는 스탠드업 코미디의 한 장면도 등장합니다.

“내가 여자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요. ‘오늘 뭐 먹을까?’ 그러면 ‘움 구냥. 아무거나.’ 이래요. ‘파스타 어때?’ ‘어제 머거자나.’ ‘삼겹살?’ ‘냄새 배자나.’ ‘냉면?’ ‘면 말고 딴 거.’ 내가 참다 참다 말해요.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먹자. 뭐 먹을래?’ 그러면 답이 옵니다. ‘왜 자꾸 물어. 난 아무거나 괜찮다니까.’ 

이 장면을 읽으며 코미디 프로그램 회의실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까는 선배, 오직 자기 아이디어만 인정하는 사람. 몇 번 겪고 나면 다들 입을 닫게 되지요.
“왜 아무도 아이디어를 안 내?”
사람들이 입을 다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들어줄 귀가 없으니까요.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다 신입 코미디언이 된 동기의 말도 인상적입니다.
”극단 생활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 바닥은 영원한 스타도 영원한 무명도 없다는 거야. 끝까지 버티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더라고.“
문제는 그 ‘버티기’가 정말 어렵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짠돌이 정신으로 버팁니다. 돈을 써서 스트레스를 풀면, 다시 돈을 벌기 위해 나가야 하니까요. 돈을 쓰지 않고 버티는 사람은, 기회가 올 때까지 조금 더 오래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소설에는 코미디 프로그램 방청 장면도 나옵니다.

‘방청객들이 입장했다. 〈코미디야〉는 아르바이트 방청객 들을 동원한다. 일반 방청객들보다 아르바이트를 쓰는 게 편하다. 돈으로 웃음을 산다. 방청객은 모두 여자였다. 방청객 인솔자의 말에 따르면 여자가 세 번 까르르 소리 내어 웃을 때 남자는 한 번 빙긋 미소 지을 뿐이라 가성비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남녀를 섞어놓으면 여자는 내숭, 남자는 체면 때문에 웃음소리가 줄어든다고 한다.’

이 대목은 요즘 제가 강연 현장에서 체감하는 현실과도 겹칩니다. 남자들만, 그것도 50대 고위 공직자들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정말 웃기기 어렵습니다. 다들 근엄한 표정으로 듣고만 계시거든요. ‘다들 화가 나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끝나고 나면 연수 담당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반응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집중해서 듣는 모습 처음이에요.” ^^ㅠㅠ

권석 선배님은 소설의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소설의 싸앗이 된 것은 유튜브에서 본 유명 코미디언의 장례식 장면이었다. 동영상은 코미디언 후배가 조문하는 모습이었다. 숭그리당당숭당당. 언제 봐도 웃기는 춤에 나는 폭소를 터뜨렸는데 동영상 속에서 오히려 울음소리가 커졌다. 문득 이게 코미디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인생의 비극 앞에서 울음 대신 오히려 춤과 웃음으로 화답하는 것. 코미디는 삶의 고달픔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니까.’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작가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생 몸담았던 일터에서 겪은 실패와 좌절, 웃음과 눈물을 이야기로 남기는 것.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는 용기가 되고, 같은 시간을 건너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테니까요. 코미디 PD가 쓴 『코미디의 영광』, 웃기기 위해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끝내 웃음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끝내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재능이나 성공이 아니라 웃기려는 마음, 그리고 버티는 힘이 아닐까요. 그 두 가지만 있다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도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조명이 켜질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오늘도 다시 한번 웃기러 나갑니다. 

"웃겨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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