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님은 언제 MBC 입사하셨어요?”
지난 11월 말에 점심 약속으로 차인표 배우와 만났을 때 처음 받은 질문입니다. “1996년에요.” “그런데 왜 저랑 한 번도 못 만났지요?”
차인표 배우는 1993년에 MBC 탤런트 공채로 데뷔했어요. 당시 신인 탤런트는 탤런트실에서 전화를 받는 일을 했어요. 그때 가장 반가운 전화는 드라마국 조연출 전화에요. “내일 촬영 나가는 전원일기 팀인데요. 30대 회사원 역할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실원 중에 섭외 가능할까요?” 스마트폰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일 없는 배우는 탤런트실에서 시간을 때우다 전화를 받고 촬영장으로 달려갑니다. 그 시절 드라마 출연진은요, 아침에 여의도 본사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함께 탑승하고 종일 같이 다녔답니다. 매니저도 없고 개인 연락할 방법도 없기에 그냥 아침에 출발해서 종일 자신의 신을 촬영할 때까지 제작진과 함께 다니는 거죠. 드라마 제작 편수가 많지도 않고 제작비도 많지 않던 옛날이야기입니다.
저는 1996년에 MBC 피디로 입사했어요. 그때는 예능 드라마 교양 직군별로 따로 뽑지 않고요. TV PD로 뽑아놓고 6개월 동안 수습사원으로 3개 부서를 다 경험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가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는데요. 교양 피디는 일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 관심 밖이었고요. 영화를 좋아해서 드라마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밤에 잠을 못 자더라고요. 밤샘 촬영하느라. 조연출 기간이 7년에서 8년 정도로 긴 것도 저처럼 나이 서른에 입사하는 이에게는 약점이었어요. 예능국 수습 시절 만난 선배들은 다 유쾌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능 피디를 선택했어요.
그러다 나이 마흔에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예능에서 사라지는 걸 보고 드라마 피디 사내공모를 통해 부서를 옮겼어요. 2007년에는 차인표 배우가 이미 스타가 된 후라 MBC에서 만날 기회는 없었어요. 우리의 인연은 오히려 드라마가 아니라 책으로 맺어집니다.
2021년에 해결책이라는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배우 차인표님의 소설을 출간하는데 혹 추천사를 쓸 수 없냐고요. ‘차인표 배우가 소설도 쓴다고?’ 궁금한 마음에 책을 펼쳤고요. 1930년대 백두산 호랑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순이를 두고 호랑이 사냥꾼인 용이와 일본군 장교 가즈오의 인연이 맞물려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면서 ‘사랑과 용서, 화해’라는 주제 의식을 묵직하게 끌고 갑니다. ‘아니 잘 생기고 멋있고 연기 잘하는 배우가 심지어 소설도 잘 쓰는 건 반칙 아닌가?’ 이렇게 추천사를 썼어요.
‘배우의 일은 대본 속 인물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작가의 소명은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너른 품으로 안아 조곤조곤 이야기로 풀어낸다. 배우 차인표가 쓴 책을 읽다가 작가 차인표를 만났다. 놀라웠다.
용서를 빌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저자가 건넨 화두가 오래도록 마음을 흔든다. 나를 아프게 한 타인을 평생 원망만 하고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통쾌한 활극의 만남 또한 인상적이다. 언젠가는 영화로도 만나고 싶은 작품이다.’
저는 영화광이자 독서광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은, 읽을 때 머릿속에 영상이 그려지는 작품이에요. 이 소설이 그랬습니다. 이 작품이 올해 다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에서 대학교재로 선정이 되었거든요. 원래 소설은 2009년에 ‘잘 가요 언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요. 책이 하도 안 팔려서 2018년에 절판되었답니다. 그런데 2021년 참고서를 주로 만드는 출판사에서 이 책을 청소년들에게 권해도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개정판을 내놓았다고요. 옥스퍼드대 아시아·중동학부 교수는 이 책을 보고 난민 등 세계 각국의 문제를 공감하려는 시각이 필요한데 마침 유럽 청소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책이라며 교재로 선정했어요.
차인표 배우가 원고 작업을 하다 중간에 파일을 날린 적도 있답니다. 상심해서 포기할까 하다 기억에서 불러내어 다시 쓰기를 거듭해 10년 만에 겨우 탈고했다고요. 고생 끝에 책을 냈는데 반응이 없어 또 낙심... 그럴 때마다 아내인 배우 신애라 씨가 “당신은 배우보다 작가로 잘 될 것”이라며 응원했답니다. 아,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이 꼭 한 사람은 필요합니다. 나의 꿈을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
그런데 사실 주위에서 이렇게 꿈을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냥 당신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해. 괜히 헛바람 들어서 작가가 된다고 그러지 말고.’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는 그랬어요. 하지만 제게도 넘버원 팬이 있습니다.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저는 남들이 뭐라 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오래 하다보면 언젠가 잘 하는 날도 올 테니까요.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어요.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딛고 일어나는 데 특화했구나. 불과 100년 전 식민지 지배라는 아픔을 겪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 이런 역전의 기회는 누구에게 올까요?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드라마 피디 시절, 신인 배우를 만나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배우가 주로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저는 기다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캐스팅 제안이 오기를 기다리고, 오디션 결과가 나기를 기다리고, 대본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촬영장 세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늘 기다리지요. 기다리다 지치기 쉽고요. 권태를 견디기 위해 자극을 찾기도 하는데요. 조심해야 해요. 자칫 잘못하면 그 자극은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잘 기다리는 게 중요합니다. 일도 중요하지만 취미도 꼭 만들고 가꾸고 길러보아요. 좋아하는 일이 따로 있어야 기다림의 순간에 소진되지 않아요.”
이건 실은 제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피디도 늘 기다립니다. 회사에서 기회가 주어지길 기다리고, 편성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작가의 답변이나 배우의 출연 승낙을 기다립니다. 특히 저는 회사에서 힘든 일을 겪으며 긴 시간 연출 기회를 기다려야 했고요.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기로 했어요. 그게 바로 독서와 걷기와 글쓰기입니다.
20대에 MBC에 배우와 피디 공채로 입사한 이들이 30년이 지나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는 게 너무 신기하네요. 세상이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혼자서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좋고요. 없으면 그냥 내가 나를 믿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언젠가 세상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며, 나는 묵묵히 내가 할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차인표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립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나도 좋고요. 이렇게 소설로도 만나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살짝 억울한 마음은 있어요. 저렇게 멋있는 분이 심지어 이렇게 글도 잘 쓰는 건 반칙 아냐? 뭐, 인생이 반드시 공평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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