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이자 영화광으로 사는 제게는 나름의 루틴이 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즈음에는 작품상 후보로 거론된 영화들을 이어서 봅니다. 영화광으로서 우리 시대 최고의 걸작을 놓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면 수상 작가의 작품을 찾아봅니다. 문학이 이루어낸 최고의 성과를 저도 감상하고 싶거든요.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이들은 아제모을루 MIT 교수와 사이먼 존슨 MIT 교수, 제임스 로빈슨 미 시카고대 교수 등 3명입니다. 국가 간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이며 수상자들이 이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의 중요성을 입증했다는 인터뷰를 보고 문득 궁금했어요. 경제 공부를 하는 제게 주어진 화두 역시 불평등의 해소거든요. 지난번에는 국내 저자의 책 <좋은 불평등>을 읽었다면 이번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겠구나, 생각하고 책을 집어 들었어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아세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저/최완규 역/장경덕 감수 | 시공사)
저는 이 책을 무척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제가 최근 몇 년간 품고 있던 의문을 해소해주었거든요. 2016년 아르헨티나 여행을 다녀온 후,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골목을 걷는데 현지인 청년 셋이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다 갑자기 손을 벌립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 하니 돈을 좀 달라고. 하도 뻔뻔하게 요구하니 그게 구걸인지 협박인지 애매모호하더군요. ‘당신은 돈 많은 여행자고, 우리는 가난한 현지인이야.’ 아르헨티나가 원래 가난했던 나라는 아니에요.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신대륙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화려한 도시였어요. 이 나라는 왜 이렇게 가난해졌을까? 한 달간 여행하며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는데요.
‘국가가 경제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착취적 제도 때문이다. 이런 제도 때문에 가난한 나라는 빈곤을 벗어날 수 없고 경제성장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짐바브웨와 시에라리온 등의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아시아에는 북한과 우즈베키스탄이 있고, 서아시아에서는 이집트가 그런 나라다. 물론 이들 나라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일부는 열대지방이고, 온대지방에 자리 잡은 나라도 있다. 영국의 식민지도 있고 일본이나 에스파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도 있다. 역사, 언어, 문화도 사뭇 다르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착취적 제도다. 그런 제도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사회의 나머지 대다수를 희생시켜가며 권력을 영구히 유지하려는 엘리트층이 도사리고 있다. 역사와 사 회구조가 다르므로 엘리트층의 성격과 착취적 제도의 구체적 내용이 달라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착취적 제도가 끈질기게 지속되는 이유는 늘 악순환과 관련이 있다. 또 그 강도는 다를지라도 이런 제도 때문에 온 국민이 가난 속에 신음해야 하는 이유도 거의 같다.’
작년 2월에 쿠바의 아바나와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여행을 갔어요. 아바나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화려한 유산을 보고요, 마드리드에서는 왕궁을 봤어요. 스페인에 아직도 왕이 있어? 영국 왕실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해서 저는 있는지도 몰랐거든요. 얼마 전 스페인에서는 홍수 피해가 심하게 났어요. 스페인 국왕이 수해 지역 방문을 갔다가 봉변을 당한 기사가 떴어요. 스페인과 영국의 결정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14세기 서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인민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왕권이 약한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어느 한 집단의 권력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다원적인 정치제도가 만들어졌지요. 왕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혁신과 투자의 유인을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백성들에게 주어졌어요. 경제 발전의 성과를 왕가가 독차지하는 게 아니에요. 성장을 이룬 주체가 직접 가질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울 방법을 고안하고요. 그 덕분에 온갖 발명이 일어나 산업혁명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스페인에서는 신대륙의 황금과 수지맞는 교역의 기회를 왕가에서 독점합니다. 즉 영국에서는 경제성장의 결과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부유해졌는데요. 스페인에서는 왕가만 배를 불립니다. 문제는 이게 영국과 스페인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경제적 제도를 이식한 식민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거죠.
‘아메리카 대륙에서 제도적 이질성이 심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유럽의 식민지 건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발달했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착취적 제도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되는 불평등 패턴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만든 정치·경제적으로 착취적인 제도는 끝까지 살아남아 대부분 지역을 가난에 찌들게 했다.’
미국이 오늘날 멕시코나 페루보다 한층 부유한 건 기업가, 개인, 정치인 모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정치·경제적인 제도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회는 국가와 시민이 함께 만들고 집행하는 정치·경제적 규율에 따라 제 기능을 수행합니다. 경제 제도는 교육을 받고, 저축과 투자를 하며, 혁신을 하고 신기술을 채택하는 등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합니다. 국민이 어떤 경제 제도하에서 살게 될지는 정치 과정을 통해 결정되며, 이 과정의 기제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제도입니다.
일본 여행을 다니며 궁금했어요. 원래 아시아에서 부자 나라는 중국과 인도였어요. 일본은 그저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100년 전 일본은 그렇게 강해졌던 걸까? 중국과 인도에서는 엘리트 집권층의 힘이 강했어요. 중국의 경우, 강력한 절대주의 정치를 펼쳤고 독립도시나 상인, 기업인은 존재하지 않거나 정치적으로 힘이 훨씬 미약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엄격한 세습 카스트제도가 발달해 시장 기능 및 직업 간 노동력 이동을 제한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무굴제국의 절대주의는 인도에서 포용적 경제제도의 발달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이었고요. 결국 19세기 들어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중국 역시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하고 유럽 수출업자에게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중국과 인도 등의 나라가 상공업적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면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은 서유럽이 대약진에 성공할 때 뒤처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 일본은 어떻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일본도 절대주의 통치하에 있었어요. 1600년에 집권한 도쿠가와 막부도 봉건제도 아래 나라를 다스리며 국제무역을 금지했습니다. 1853년 7월, 미국의 매슈 C. 페리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전함이 도쿄 앞바다에 나타납니다. 미국의 위협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반대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메이지유신이라는 정치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막부가 권력을 잃고요. 유신지사라는 신진세력들이 일본의 정치 권력을 재편합니다. 일본의 정치혁명은 한층 포용적인 정치제도로 이어졌고 그에 따라 더 포용적인 경제 제도 역시 발달할 수 있었으며, 궁극적으로 빠른 경제성장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반면 중국은 절대주의 체제를 고수한 탓에 한참 뒤처지고 말았지요.
원래 중국은 해상력이 막강해서 유럽인보다 수 세기 앞서 장거리 무역이 활발했어요. 하지만 15세기 초, 명왕조 황제들은 장거리 무역이 늘면 해외에서 새로운 사상이 유입되어 자신들의 정권이 위협받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원거리 무역을 금지합니다. 조선 말 쇄국정책을 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서양 신부들이 들어와 가톨릭을 전파하자, 조선의 상류층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한양에 있는 왕이 아니라 저 멀리 바티칸에 있는 교황을 따르는 이들이 생겨날 판이니까요. 즉 가톨릭 포교는 조선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고요. 그래서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해외 문물을 받아들이는 걸 금지합니다.
나라는 언제 망하느냐. 엘리트 집권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착취적 제도를 그대로 유지할 때 망합니다. 책을 보면 지난 70년 사이 남북한의 경제 격차가 벌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데요.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개인이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경제적 성과는 갈립니다.
지난 몇 년간 해외여행을 다니며 품었던 의문이 이 책 덕분에 많이 해소되었어요. 그러면서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196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난 건 천운이었구나.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체제의 일원으로 살아온 덕분에 많은 것을 경험하고 누리게 되었구나, 하고요. 국가간 경제적 불평등이 날로 커지고 있는데요. 모쪼록 이 책을 통해 포용적인 정치와 경제 제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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