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며 지내셨나요? 이번 명절 연휴 동안 저는 내년에 나올 책의 원고 작업을 계속 했어요. 평소에는 전국으로 강의를 다니느라 차분히 앉아서 원고를 보는 시간이 없는데요. 연휴 동안 작정하고 집에서 집필모드로 지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밤사이에 편집자가 보낸 원고를 받아들고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아침 6시에는 채소 샐러드부터 식사를 하고요. 8시에는 아침 산책을 나가 뒷산을 한 시간 정도 걷고 옵니다. 9월 중순인데도 한낮에는 덥더라고요. 그래서 기온이 오르기 전에 먼저 운동부터 합니다. 다녀와서 다시 노트북 자판을 잡습니다. 저는 걷고 나면 글이 더 잘 써집니다. 어떤 책에서 그러더군요. 혈액 순환이 뇌로 가는 혈류의 움직임을 도와주기에 창의성을 키워준다고요. 그때 지인에게 톡이 왔어요. 서울광장에서 재미난 거리 공연을 하니까 보러 오라고요. 첫날은 원고 작업하느라 못 간다고 했는데요. 그 분이 보내준 사이트 주소로 가보니까... 음, 이게 그냥 길거리 공연이 아니더라고요.
<2024 서울 거리 예술 축제>
https://www.ssaf.or.kr/index
프로그램을 보다 갑자기 흥미가 동해 추석날 오전에 원고 작업을 마치고 달려갔어요.
시작은 '붐비트 브라스밴드의 신나는 마칭 퍼레이드'였어요.
트롬본, 트럼펫, 색소폰에 수자폰까지 신나게 연주하며 행진하고요.
시민들이 마칭 밴드를 따라 함께 청계천을 걸었어요.
엔딩곡은 <그대에게>. 완전 신나는 무대였어요.
신이 난 저는 열광적으로 앵콜을 외쳤는데요, 바로 뒤에서 다음 무대가 시작한다고요. 아쉽지만 붐비트 브라스밴드의 공연은 다음에 또 찾아봐야겠어요.
제가 본 두번째 공연은 랩퍼토리. 롤러스케이트를 탄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코드 세시'라는 한국의 서커스 창작단체가 만든 작품인데요. 커다란 후프와 함께 춤을 추며, 다양한 묘기를 선보입니다.
서커스 공연을 볼 때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인간은 자신이 상상한 바를 치열한 연습을 통해 현실로 옮기는 경의로운 존재거든요. 불가능의 영역을 가능의 영역으로 옮겨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의지입니다. 숱한 도전과 실패와 고난과 상처가 있지만,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 결과물인 영광의 순간입니다.
다음으로 본 건 <롤러와 첼로>
'르 파탱 리브르'라는 캐나다 퀘벡의 컨템포러리 스케이팅 예술 단체의 공연입니다.
공연 시작하면 주인공들이 아스팔트로 나와 스트레칭을 하고 스케이트를 신는데요. 약 7분 정도 소요됩니다. 묘기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게는 꽤 긴 시간이지요. 모든 공연에는 빌드업이 있습니다. 그걸 지루하다고 느끼고 관람을 포기하고 그냥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청계천과 무교동 일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연이 진행되니까 다른 공연을 보러 가는 거지요.
저는 도입부가 길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빌드업 없이 처음부터 바로 클라이맥스로 가면, 흥분은 금세 식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긴장을 올려가는 것, 그게 진짜 프로의 자세이지요. 다만 스마트폰의 숏폼에 익숙해진 요즘 관객들은 그런 빌드업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들은 30분의 공연을 위해 30년을 단련해온 사람들이에요. 기꺼이 10분 정도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스팔트 위에서 펼쳐지는 아이스 발레 같아요. 무척 우아하고 멋있는 공연입니다. 퀘벡은 얼음의 도시입니다. 아이스하키로도 유명하지요. 어린 시절부터 스케이트를 신고 빙판위를 누비던 이들이 2005년에 모여 결성한 단체이고요. 아이스 스케이트라는 스포츠에서 <롤러와 첼로>라는 예술작품을 탄생시켰어요.
어려서 피겨 스케이트를 했지만 나이들어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어른이 됩니다. 엄마가 된 여성 스케이터가 데려온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어요. 나이 들어서도 내가 좋아하는 스케이팅을 계속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침 퀘벡은 <태양의 서커스>가 태어난 고장이에요. 그래, 아이스 스케이트를 서커스의 영역으로 확대해볼 수도 있겠다! 그런 시도가 이런 놀라운 공연으로 이어졌어요. 그래요, 이게 인생이에요.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보는 것.
'책읽는 냇가' 행사가 진행중인 청계천을 따라 다음 공연장소로 갑니다.
서울스테이지 2024 연계 공연 <풍류>를 보러 갑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의 이수자인 오단해님의 노래 공연인데요. 사철가나 심청가 중 '둥둥 내딸이야' 같은 전통 판소리도 좋았고요.
<민물장어의 꿈>과 <바람의 노래>도 좋았어요. 판소리꾼이 부르는 대중가요도 독특하면서도 매력있어요. 가을에 나올 앨범 <히스토리>의 타이틀곡을 들려주셨는데요. 오단해님의 공연을 또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앵콜곡은 <밀양아리랑>으로 흥겹게 마무으리~
컴퍼니 스쿠프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무교동 거리를 헤매던 이들은 결국 서울도서관 벽을 타고 하늘로 사라집니다. 추석 당일 낮에 30도를 넘어가는 날씨에 털옷 의상을 입고 30분 가까이 온갖 동작을 선보이며 최선을 다해 기예를 보여주는 모습에 감동했어요.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펼쳐진 그날의 엔딩 공연.
와이즈 풀스의 <트래쉬페즈> 공연. 공중그네 공연으로 세계적인 서커스 페스티벌에서 은메달을 수상한 팀인데요. 핀란드와 남아프리카 출신의 여성 서커스 트리오입니다.
제가 처음 해외 여행을 간 건 1992년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였는데요. 그때 제가 본 것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게 거리예술, 즉 버스킹 공연이었어요. 런던 피카디리 서커스 앞에서 본 드럼 공연, 파리의 퐁피두 센터 앞에서 본 마임 쇼, 프라하의 카를교에서 본 첼로 연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걸로 벌이를 삼는 사람이 있다니! 제게는 문화 충격이었어요.
'나도 저렇게 살고싶다!'란 생각을 했었지요. 어쩌면 블로그에 매주 3편씩 글을 올리는 게 저의 거리 공연인지도 몰라요. 이렇게 저는 책 원고나 강연의 주제가 될 생각의 단편을 모읍니다. 이렇게 쓴 글이 어느 순간 도서관 저자 강연 질의 응답 시간에 답변이 되기도 하고요. 책의 원고 한꼭지가 되기도 해요. 안 되어도 괜찮아요. 저는 지금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이 순간이 즐겁거든요.
올 추석, 책 원고 작업하느라 어디 가지는 않고 서울에서만 지냈는데요. 그런 나를 위해 전세계에서 공연자들이 찾아왔군요. 서울거리예술축제, 이런 멋진 행사를 준비해주신 서울문화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내년 추석에도 찾아갈게요.
서울거리예술축제, 이곳이야말로 공짜로 즐기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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