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코로나로 인한 여행 규제가 풀리면 어디를 갈까? 쿠바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항공권을 검색하다 뉴욕 - 올랜도 - 아바나 - 마드리드 -이스탄불 항공권을 끊었어요. 항공료만 500만 원 가까이 들었어요. 지구를 한바퀴 도는 일정입니다. 미니 세계일주로군요.
5주간의 여행 마지막 구간입니다. 숙소는 하기아 소피아 근처에 잡았어요. 예전에 왔을 때는 저가 숙소를 잡는다고 탁심 광장 근처 호텔을 잡았는데요. 2월은 여행 비수기라 그런지 숙박료가 저렴해 그냥 위치 좋은 곳으로 잡았어요. 지도로 볼 때 가깝기는 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숙소를 나와서 잠깐 걷다보니 바로 블루 모스크가 보이고요. 블루 모스크 맞은 편에 하기아 소피아가 있습니다. 숙소 앞에 한국 단체 여행자들이 서 있어 무슨 일인가보니 거기가 투어버스 내리는 곳이더라고요. 그만큼 위치가 좋았다는 반증이겠지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지은 두 개의 사원, 하기아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그 가운데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아마 이곳에서 많은 생각을 하며 보낼 것 같아요.
2월의 이스탄불, 많이 춥지는 않아요.
코로나가 끝난 직후라 유럽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많았어요.
저는 공원 산책을 좋아합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보며 걷습니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 딱 그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요.
그래서 유럽의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다가 이슬람 제국의 수도로 바뀌었지요.
이스탄불 시내를 걷다 보면
길냥이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꼭 개처럼 행인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오는 녀석들. '너희 고양이의 매력은 도도한 데서 오는 거 아니었어?'
인간은 위대할까요, 어리석을까요? 하기아 소피아를 처음 봤을 때는 그 위대한 도전 정신에 놀랐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큰 돔을 짓는데, 천정을 지탱하는 가운데 기둥 없이 만들 생각을 했다고? 이게 무너질까 두렵지도 않았던 걸까?'
이스탄불의 원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이고요.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어요. 즉 이 도시를 세운 이들은 로마 제국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판테온을 보고 자랐고, 콜롯세움을 보고 자랐어요. 로마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을 보고 자랐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블루 모스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눈 앞에 기독교도들이 세운 하기아 소피아가 있어요. '기독교인들이 만들 수 있다면 위대한 마호메트의 후손인 우리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한국 사람이 위대한 이유가 뭘까요? 남들이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일본이 패전 후, 빠른 속도로 경제 부흥을 하는 걸 보고 우리도 일본을 따라 했습니다. 일본이 하는 건 다 했어요. 자동차도 만들고, 전자 제품도 만들고. 일제 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며 조선 시대 봉건제 신분사회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입장에서 경쟁이 시작되었어요.
우리는 모두가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옆집 아이가 서울대를 가면, 우리집 애도 보낼 수 있다고 믿고요. 옆집 아빠가 주식으로 대박을 내면, 우리집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미 양극화가 고착화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성적이 뜻대로 나오지 않으면 우울증에 빠지고요,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분노하게 됩니다. 위대한 도전은 삐끗하면 결핍과 우울로 이어집니다. 위대한 도전의 시대, 고도성장기가 끝났어요. 이제는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기아 소피아 앞에 독일 분수가 있습니다. 설명문을 읽어보니 1898년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2세 방문 기념으로 세웠는데, 독일 터키간의 돈독한 우정을 기념하는 유적이랍니다. 이스탄불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유시민 작가의 <유럽 도시 기행 1권>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집트, 이라크, 팔레스타인을 영국에 넘겨주고 모로코, 튀니지, 시리아와 터키 남동부 지역을 프랑스에게 내주었으며, 에게해의 섬 대부분과 에게해 연안 도시들을 그리스에 빼앗겼다. 수도 이스탄불마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연합군이 장악했다. 1922년 12월 마지막 술판이 제국의 해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스탄불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을 때 오스만제국은 공식 사망 선고를 받았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둘러보면 오스만제국의 영광의 역사가 다시 보입니다. 유럽과 맞선 아시아 제국,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슬람 전사들. 그 영광의 마지막은? 독일과 손잡았다가 쫄딱 망했어요. 술탄과 황제가 손을 잡았다가 두 제국이 멸망합니다. 프러시아의 황제와 동맹을 맺을 때는 좋았겠지요. '과거의 영광을 다시 한번!' 그 결정이 오스만 제국의 몰락을 가져옵니다. 인생, 참 어려워요.
인간은 위대할까요, 어리석을까요?
저는 인간은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위대해지고 싶은 욕심에 어리석은 선택을 거듭하는 존재... 지금 보아 위대한 선택이라 느낀 것도 훗날 돌이켜보면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이 드러날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요. 기회가 오면 용기를 내어 도전할 필요도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물러나서 겸손해질 필요도 있어요.
이스탄불 여행기,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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