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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단편 소설을 읽는 즐거움

by 김민식pd 2024. 8. 19.

지난 1년 넘게 계속 경제경영 책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읽었습니다. 그래서 저축이 중요한가, 투자가 중요한가, 연금을 모은다면 개인 연금인가, 국민 연금인가, 부동산을 구입한다면 빚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계속 책을 읽었고요. 블로그에 연재한 <짠돌이의 경제 공부> 원고를 다듬고 고쳐서 지난 8월 11일에 편집자에게 보냈습니다.

이제 저는 과제를 제출하고 채점된 답안지를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편집자에게 초고를 보낼 때는 내가 지금 이 순간 쥐어 짜낼 수 있는 최선의 힘을 다해 써서 보내고요. 그런 다음에는 그 원고를 남의 집에 입양 보낸 자식이라 여기며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 소중한 자식이라며 계속 끼고 앉아 있으면 막상 편집자가 보내온 피드백에 방어적으로 대응할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 답을 기다리는 긴장되는 시간에 무엇을 할까? 이럴 때 저는 재미난 소설을 찾아 읽습니다. 마침 그동안 읽고 싶었는데 경제 공부 원고 작업하느라 아껴둔 책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편성준 저자가 <읽는 기쁨>에서 소개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소설 /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입니다.

‘제목이 너무 딱딱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으나 막상 읽기 시작하자 정말 재미있어서 ‘단편 소설을 이렇게 잘 쓸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소설집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상하지만 이해하고 싶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사랑스러운 인간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 훌륭하지만 특히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머킨」이라는 단편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물리학 시간에 어려운 시험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앉아 있던 헤더라는 여학생이 자신보다 서른 살 많은 그 교수의 방으로 가서 차를 마시며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곡을 듣다가 친해진 얘기다. 

두 사람은 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여학생은 남자 친구가 있었고 결국 그와 결혼을 한다. 이걸 늙은 교수와 여학생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단박에 통속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리지만 너무나 조심스럽고 서로를 극도로 배려하는 이야기로 이해할 땐 애틋한 사랑의 서정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앤드루 포터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다. 글을 정말 잘 쓰는 것이다. 마지막에 여학생이 텅 빈 교수의 집(그녀에게 열쇠가 있었다)으로 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그가 오기 전 일어나 다시 나오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서글퍼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읽는 기쁨> 중에서

편성준 저자의 영업에 넘어가서 책을 읽었고요. 정말 재미있네요. 소설을 보면 너무 사랑하기에 헤어지는 두 남녀가 나오는데요, 서로를 극도로 배려하고 서로를 너무나 좋아하기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갑니다. 이게 소설의 효용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겪어본 적이 없거나, 겪고 싶지 않거나, 겪을 일이 없는 일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공감하게 만들어주거든요.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품은 첫 번째 수록작인 <구멍>입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지만, 십이 년 전 여름, 탈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주 동안, 어머니는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나를 안아주곤 했다. 내가 밖에 나가려고 하면 나를 끌어당겨 꼭 껴안았고, 나중에는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내 까까머리를 쓰다듬고 내게 바짝 몸을 붙이며 내 이름을 속삭여 불렀다.’

탈의 집에 있는 구멍은 탈의 아버지가 불법적으로 비집어 열어놓은 맨홀로, 폐하수관으로 연결되어 있었어요. 탈의 가족은 잔디 깎은 것이며 잡초들을 쓰레기 봉지에 모아 담지 않고, 맨홀의 철제 뚜껑을 들어 올려 그 구멍 속에 버리곤 합니다. 탈의 부모님이 호수로 낚시를 떠난 어느 오후, 탈의 형이 탈에게 잔디를 깎으라고 심부름을 시키며 50센트를 줍니다. 탈은 깎은 잔디를 모은 쓰레기 봉지를 구멍에 떨어트립니다. 실수로 그랬는지, 일부러 그랬는지는 알 수 없어요. 아이는 사다리를 타고 구멍에 들어갔다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아이를 구하러 출동한 두 명의 소방관까지 구멍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쓰레기 더미가 만들어낸 이산화탄소에 질식한 거죠. 밀폐된 공간에 들어가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군요. 

자, 이제 남은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킨 형은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요.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아이는 이웃에 사는 친구의 부모님들을 볼 수가 없어요. 가족은 이사를 떠납니다. 위험한 구멍을 만든 어른의 잘못일까요, 동생에게 일을 시킨 형의 잘못일까요, 위험한 행동을 하려는 친구를 막지 않은 아이의 잘못일까요.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어요. 인생을 산다는 것은 때로는 이런 겁니다. 비극이 찾아왔을 때,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기는 쉽지요. 하지만 그 비극을 안고 남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자 앤드루 포터는 삶의 비극을 참으로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네요. 

어려서 저는 스티븐 킹의 공포 소설 단편집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단편선도 즐겨 읽고요. 단편 소설집은 제게 과자 종합 선물 세트 같아요. 뚜껑을 열기 전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지 알 수 없고요. 직접 읽어보기 전에는 어떤 맛일지 알 수 없어요.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며 혼자만의 점수를 매깁니다. 이제 <읽는 기쁨>에서 편성준 저자가 추천한 책들을 찾아 읽으며 당분간은 재미난 소설 읽는 삼매경에 푹 빠져보렵니다.

여름의 끝에서, 재미난 소설을 만나보시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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