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말에 도서관에 들러 새로 나온 신간 코너를 둘러보며 읽을 책을 찾습니다. 그러다 제목이 말을 걸면 일단 책을 꺼내보는데요. ‘치매의 벽’이라는 제목이 있었어요. 응? 일단 제가 요즘 관심이 많은 치매에 대한 책이니 살펴봅니다. 표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치매는 우리의 뇌가 선물하는 최후의 선물이다’ 응? 이건 저의 믿음과 반대되는 주장이네요. 치매가 선물이라니. 문득 호기심이 생깁니다.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치매의 벽> (와다 히데키 / 허영주 옮김 / 김철중 감수 / 지상사)
일본의 치매 환자 수가 마침내 천만 명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오랜 시간 고령자 정신 의료에 종사한 의사가 직접 쓴 책입니다.
치매에 대한 3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치매는 진행이 매우 빠른 병’이라는 잘못된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노인성 치매는 발생 후 서서히 진행되며 평균 10년 정도 걸쳐서 진행된 후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의 경우, 그 원인 물질인 아밀로이드 베타라는 단백질의 축적은 증상 발생 20년 전에 이미 시작된 케이스가 많습니다. 발병하고 30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번째 오해는 “난폭해지고, 알 수 없는 말로 소리 지르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치매 환자는 통상적으로 점점 온순해지고 조용해집니다. 치매란 병은 폭력적인 행동이나 이상한 언동처럼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를’ 병이 아니라 ‘점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병입니다. 치매가 진행되면 온순해져서 외출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요. 의사가 보기에 배회하다 길을 잃는 것보다 더 걱정스러운 건 집에 틀어박혀 허리가 약해지고 허약 상태에 빠지는 것이랍니다.
세 번째는 ‘치매가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는 오해입니다.
치매 초기에는 기억의 입력이 어렵고 이후 증상이 진행되면서 장기 기억을 잃어버립니다. 기억력이 쇠퇴하더라도 지능 수준, 즉 판단력과 사고 능력의 수준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요. 정상적인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치매 환자도 많습니다. 치매가 오더라도 중요한 직책을 수행할 수도 있습니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은 82세 때 알츠하이머형 치매로 진단받고 그 이듬해에 언론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이미 임기 중에 이미 치매 증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치매를 앓아도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에는 큰 지장은 없었던 셈이지요.
자, 그렇다면 환자가 치매 진료를 받으면 가족은 우선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의사인 저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가급적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을 보내는 것이 치매의 진행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요.
혼자 사는 노부모를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집으로 모시면 치매는 악화됩니다. 치매 환자는 새로운 것을 기억하기 어렵기 때문에 익숙한 환경을 떠나 새로운 주거 환경에 적응하기 곤란하고요. 환경의 변화가 스트레스와 적응 장애의 원인이 되어 치매를 악화시키게 됩니다. 특히 시골에 사는 노친을 도시로 불러들이면 실패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요.
고령자의 자살율은 혼자 살 때보다 가족과 함께 살 때 더 높습니다.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친다는 자책감으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거든요. 오히려 혼자 사는 사람이 치매 진행이 느립니다. 혼자서 생활하기 위해 계속 활동을 해야 하고 뇌에 자극을 줘야 하니까요.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의존하는 순간, 오히려 뇌의 활동은 줄어듭니다.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교류’ ‘적당한 운동’ ‘취미 활동’입니다. 반면 세 가지 나쁜 습관이 있는데요. ‘집에만 머물기’ ‘운동 부족’ ‘취미 없음’입니다. 가족들이 치매 환자 간병에 임할 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너무 힘쓰지 말자’ 그리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입니다. 치매 간병은 쉬엄쉬엄하는 것입니다. 갈 길이 먼 마라톤 같은 간병을 단거리 질주하듯 달려서는 돌봄 노동하다 지치고요,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 병 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흥미롭게 눈여겨본 대목은 치매 노인과의 대화법입니다. 치매가 오면 자신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해 주위 사람이 훔쳐갔다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도둑맞았다는 망상에 어떻게 대응할까요?
X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가 훔쳤다고 그래요!
O 같이 찾아볼까요?
치매 환자의 뇌는 자존심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망상을 만들어냅니다.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을 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이 훔쳐갔다는 망상에 빠지는 거죠. 이럴 때 가장 좋은 대처법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환자의 불만과 불안에 가까이 다가가 주는 겁니다. “함께 찾아볼까요?” 하면서 온화하게 대응하고 짐작 가는 장소를 찾아보는 게 좋지요. 간병인이 훔쳐갔다고 의심하는 경우, 간병인이 먼저 찾았다고 “여기 있네요.”하고 내놓지 말고 환자가 알아챌 수 있는 곳에 두어 본인이 직접 찾게 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찾아주면 “훔쳤던 걸 다시 내놓은 게지.”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집에 있으면서 “집에 가겠다”고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X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여기가 집이 잖아요!
O 그럼 집까지 배웅해줄게요.
금방 식사했는데 “밥 줘”라고 할 때는?
X 좀 전에 먹었잖아요!
O 차라도 마시면서 조금 기다려 주세요.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때는?
X 또 시작했네. 좀 적당히 해요!
O 뭐가 그렇게 슬퍼요. 얘기 좀 해봐요.
이렇게 대하는 거지요. 중요한 건 치매 환자와도 웃으며 서로 끄덕여주고 대화를 이어가는 겁니다. 저자는 치매가 진행하면 많은 사람들은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기억력의 쇠퇴와 함께 나쁜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치매라는 감각마저 없어지며 성격이 밝아지고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
치매라서 불행하다는 생각은 건강한 사람들의 편의적인 믿음이라고요. 치매는 우리의 뇌가 선사하는 ‘최후의 선물’이랍니다. 치매가 진행하면 불만이나 불안은 사라지고요. 순간의 즐거움에 집중하게 됩니다. 의사인 저자는 치매가 ‘온화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적응 현상’으로 ‘우리 인체가 가지고 있는 궁극의 최후 활동 기능’이라고 말합니다.
정작 치매가 최후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치매 이상으로 불행한 것은 바로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말합니다. 우울증에 걸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두운 노인’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인생 최대의 비극이라고요. 마음의 건강에 이상을 느꼈을 때에는 주저하지 말고 바로 병원에 갈 것을 권합니다.
정년 후 우울증이 발생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에너지를 쏟아붓던 대상을 잃어버릴 때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우울한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현역 시절 오로지 일밖에 몰라 취미도 없고 업무 관계 외에는 친구도 없는 사람이 노인성 우울증을 겪기 쉽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애를 충족시켜 주던 대상을 잃었을 때’입니다. 정년 전부터 미리 회사 밖에서 자기애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찾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루에 7시간 정도 수면 시간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살면 아밀로이드 베타가 뇌에 쌓여 치매 발생 위험이 높아집니다. 매일 30분 유산소 운동 습관은 숙면에 도움이 됩니다. 가장 쉬운 운동은 역시 걷기겠지요. 저자는 아침 식사를 거르지 말고 오전에 햇빛을 받으며 산책하는 것이 중요한 루틴이라고 말합니다.
치매와 연관이 높은 것 중 하나가 치아 상태입니다. 치아가 있다면 저작근을 움직여서 씹는 동작을 하고요, 잘 씹을 때 그 자극에 의해 뇌에 혈류가 보내져서 신진대사가 활발해집니다. 음식을 잘 씹어서 먹는 습관도 중요합니다.
끝으로 약간 엉뚱한 저자의 세 가지 조언을 소개하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는 사치를 하자. 돈을 쓰는 것은 뇌를 쓰는 것이거든요. 적절한 사치는 뇌를 젊어지게 합니다. 둘째, 혼자 살자. 가족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와 몸을 쓰며 사는 것이 치매 진행을 늦추어줍니다. 셋째, 살찌자. 콜레스테롤은 뇌와 몸의 세포막 재료인데, 이게 부족하면 세포 재생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체중이 조금 더 나가는 편이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습니다.
버나드 쇼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늙어서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지 않아서 늙는다.” 모쪼록 오래오래 인생을 즐기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노후를 맞이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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