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발령이 나고, 인사정보 시스템에 들어가 보니, 16년 동안 '제작 PD'이던 직군이 '방송 경영'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 이제 그럼 김민식 PD가 아닌거야?'

 

나는 누구인가? 김민식? 김민식은 야구선수도 있고, 축구선수도 있고, 가수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김민식 PD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항진명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참인 정의는 아니었다.  

 

작년 한 해 김재철 사장이 저지른 짓 가운데 가장 황당했던 게, PD 수첩의 이우환 PD를 용인 드라미아 센터로 강제발령한 일이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피디로 평생 살아온 사람에게 세트장 견학 업무를 시키는 것, 딱 김재철 수준이다. 

 

2011/06/08 - [공짜 PD 스쿨] - PD수첩 PD들이, 지금 PD를 못 하는 이유

 

위의 글을 블로그에 쓴 게 딱 1년 전 일이다. 기대된다. 대기발령 후에 나를 어디로 발령낼 지. 아, 발령을 안 낼 수도 있겠구나. 발령을 안 내면 자동 해고니까. 번거럽게 인사위원회에 회부해서 해고할 필요도 없고.

 

'나는 00다'

빈칸을 채워서 항진명제를 만들어 보라.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이 대목에서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00다'에서 빈 칸에 들어가 항상 참인 말은?

 

 

 

 

 

---잠깐 고민의 시간---                         ^^

 

 

 

 

 

 

 

'나는 누구인가?' 늘 고민하며 산다. 나의 삶은 그 고민의 결과이다. '나는 공대생이다' '나는 영업사원이다' '나는 통역사다' '나는 예능 피디다' '나는 드라마 피디다' 그 무엇도 항진명제는 아니었다.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위의 빈 칸에 들어가 항진명제를 만드는 말은 '죽는'이다.  

 

'나는 죽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항진명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가슴에 품고 살면 하루 하루 즐겁게 살 수 있다.

 

9년전, 아끼던 후배가 죽었다. 삼성SDS를 다니며 정말 열심히 일하던 친구였다. 쌓인 피로를 폭탄주로 풀고, 일하느라 건강검진도 소홀한 친구였는데, 어느날 일하다 피로 과다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서 보니 간암 말기였다. 일하느라 결혼도 미룬 후배는 결국 설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혼자 살던 후배는 병원에서 입원도 받아주지 않아 마지막에는 호텔에서 생활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호텔에는 하루에 한 번씩 들여다보는 직원이 있으니까. 호텔에서 생활하는 게 안쓰러워 후배를 집으로 데려와 같이 지냈다. 당시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어서 혼자 살고 있었으니까. 잘 먹이거나 챙겨줄 자신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내가 딴 건 몰라도, 웃겨줄 자신은 있다.'

 

하지만 후배에게 도움이 된 건 나의 사람 웃기는 재주가 아니라 안마 기술이었다. 암말기 환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다.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살이 급속도로 빠진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뼈마디 마디가 배겨온다. 후배의 신음 소리에 눈을 뜨면, 아침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후배의 몸을 주물러줘야 밤새 배긴 근육이 풀렸다.     

 

사람들은 내가 후배를 돌봤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랑 사는 한 달 동안, 후배가 나를 돌봤다. 그 녀석이 일에 빠져 사는 내게 해준 충고가 있다. '형,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요? 그럼 지금 그냥 하세요. 행복은 미루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한 달 후, 후배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후, 후배가 던져준 화두를 안고 산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라는 명제를 안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한다. 세상을 어떻게 하면 즐길 것인가. 공짜로 즐겨야 제대로 즐긴다. 돈들여 즐기는 것은 자칫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매일, 공짜로 즐기는 세상을 마음껏 누리며 산다.

 

대기발령이 던져준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김민식 피디인가? 이제는 아니다.

나는 MBC 직원인가? 곧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공짜로 즐기는 세상'의 주인이다.

 

 

 

취미 하나 없던 녀석인데, 시한부 판정을 받고 디카에 취미를 들였다. 후배가 찍어준 사진이다. 

항상 즐겁게 사시길.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서명부.pdf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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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름다운시절 2012.06.05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참 옳은 이야기세요. 그 힘이 있기에 지금도 즐기며 견디시는 거겠죠. "김민식 피디님"으로 꼬옥 돌아가셔서 명자를 아낀 걸 누가 알쏘냐 만드시고^^ 시청자들에게도 건강한 웃음주세요! 화이팅_(≥▽≤)/!

  3. sz lisw 2012.06.05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침부터 눈물 나요 ㅠㅠ

  4. 아름다운시절 2012.06.05 08: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참 옳은 이야기세요. 그 힘이 있기에 지금도 즐기며 견디시는 거겠죠. "김민식 피디님"으로 꼬옥 돌아가셔서 명자를 아낀 걸 누가 알쏘냐 만드시고^^ 시청자들에게도 건강한 웃음주세요! 화이팅_(≥▽≤)/!

  5. 간큰고양이 2012.06.05 0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침부터 눈물나려고 하네요ㅠㅠ

  6. 엉엉 2012.06.05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은 사람이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많은데 감사해요. 덕분에 아침부터 울었잖아요. 사람 되도록 저도 노력하면서 살겠습니다.

  7. 딸기21 2012.06.05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 내십시오. 응원합니다!!!

  8. 멋진 고백 2012.06.05 13: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분이시란 거 짐작하고 있었지만 새삼 확인하게 되네요.

  9. 마담디 2012.06.05 13: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힘내세요. ^^
    저도 힘낼렵니다.
    사랑하는 딸이 있으니까요~
    화이팅!!!

  10. 전람회 2012.06.05 1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이 먹먹하네요...
    힘내세요...응원하고 있습니다..힘겨우신 싸움을 하시는
    피디님께...도움도 못주면서..감히 이런 부탁드립니다..
    이기시길...꼭 승리하시길!!!!!

  11. euni 2012.06.05 14: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멋진 선배님들은 만난 전.. 정말 행운아 인것같아요. 이젠 연애특강을 넘어서 인생특강까지... 많은걸 느껴가며 배우고, 생각해보고 한답니다.

  12. 노란비행기날리다 2012.06.05 18: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 글보면 맘이 참 즐겁고 오히려 저가 힘이나네요...
    늘 인터넷 키면 가장 먼저 들어와요 ^^ 히힛
    ==
    추가..
    헙... 구속영장 다시 청구했다는데.. ㅠㅠ
    분명... 좋은소식 날라올꺼예요!! !! 퐈이야!!


  13. 히스이 2012.06.05 22: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웃으면서 끝까지! 란 말이 마음에 참 와닿네요.
    마음으로나마 응원합니다. 화이팅!

  14. 박인해 2012.06.05 22: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를 통해서 PD님의 매일같은 정성이, 즐거움이 세상을 움직이셨네요. 이름없는 저같은 사람도 여기까지와서 힘내시라고 응원해드리는것외에는 해드릴게없지만...서늘한간담회 고별방송 소식듣고 맘이 아프네요 유쾌했던 기억만큼 꼭 이기실겁니다 암요~~

  15. 김지은 2012.06.05 23:5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싸우시는 용기에 박수를 드립니다..

  16. 릴리 2012.06.06 00: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여기 블로그와서 힘을 얻습니다. 많이 배우고요. 부끄러워 댓글은 처음인데.. 이번엔 꼭 힘을 드리고 싶어 용기냈습니다. 웃는 모습이 제일 귀여운 김민식 pd님! 웃으면서 승리하시길.

  17. 새벽단비 2012.06.06 0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참 공부가 하기 싫은 날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격지심에 힘든 시간이었거든요.
    한 일이라곤 웹툰 '미생'을 본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PD님 글을 잠들기 전에 만났습니다. 오늘 하루가 부끄러워지네요.

    • 김민식pd 2012.06.06 0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워워워~ 그렇게 자책할 필요없어요. 때론 하루 종일 자신을 나태하게 굴리는 것도 스스로를 위한 소중한 선물이라구요. 나도 알고보면 대땅 게을러요, 우리 마님한테 물어보세요. 나의 최강 안티, 마님 ㅋㅋㅋ

  18. 신효진 2012.06.06 0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서늘한 간담회 고별방송 소식 보고 와서 읽는 이 글은
    마음을, 사는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네요.
    PD님이 노조집행부에 계신 것이
    mbc 파업이 즐겁고 명랑해지는데에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전에 대학 때 교수님께서 그런 얘기하신 적 있어요.
    노교수님이셔서 독재 시대 등을 다 거치신 분이었는데
    그 때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에 지금도 너무 부끄럽고 괴롭다고요..
    절대~! 그럴리 없겠지만
    이번에 혹시 잠깐 구치소 유랑가시게 되더라도
    지금 이렇게 열심히 싸웠던 기억이 나중에 절대 부끄럽지 않을 기억이란 거!
    또 절대 그럴리 없겠지만
    이 상황에 PD님이 혹여나 절망 저 언저리에라도 가셨을까봐 두서 없지만 적었어요.
    (하지만 PD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죠^^)
    응원하고 싶습니다. 응원하고 있고요!
    또 그런 시청자들이 아주 많다는 거 기억해주세요.
    PD님 감사해요!
    힘내셔야 해요!

    • 김민식pd 2012.06.06 0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내 평생 배운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내가 배운 건 딱 하나거든요. 즐거운 게 남는 거다. 네, 절망하지 않아요. 더 큰 사명감을 느낄 뿐이랍니다. 즐겁게 싸울 수 있는 자가, 싸워야하는 거죠.

  19. 강선미 2012.06.06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이 아프네요.
    재처리씨건 서명서 출력시켜놨어요. 저 아파트를 돌아서라도 100개의 서명은 책임지고 받아드릴게요.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빛난다고 더없이 소중해진 마봉춘입니다.
    곧 날이 밝을거예요.화이팅!

  20. Jane 2012.06.07 02: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 막 서늘한 간담회 잠정 마지막회 듣고 왔습니다. 저는 꼭 이기실거라고 믿습니다. 재처리쓰레기 트리오 따위들이 무너뜨릴 '간땡이5인방'이 아니죠. 피디님및 MBC노조원들 뒤에는 '마봉춘'을 믿고 지지하는 저희들이 있어요. '싫어하시는'(?) 나꼼수 모토 외쳐봅니다. '쫄지마!' 그리고 '질기고, 독하고, 당당하게!' 마봉춘 홧팅!

  21. 허허허 2012.06.08 1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살면서 대기발령도 받고 그런거지... 능력되는 사람들은 전부 종편으로 비싼 연봉받고 옮겼더만....제안들어올때 가시지.. 뭣하러 mbc처다보고. 대모하는지.... 인사권은 사장 ceo고유 권한이어서 제 3자가 왈가왈부 할수 없는데.. 중이 싫음 절을 떠나야지 솔직히 주말에 설날에 볼거 뭐있냐 파업하는 공중파 직원들이나 사장들이나 다 밥그릇 싸움으로 밖에 안보인다. 재밌는거 하나도 없으면서 시청자들은 진짜 지루한데 지들끼리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