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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대기발령이 던져준 질문, 나는 누구인가?

by 김민식pd 2012. 6. 5.

대기발령이 나고, 인사정보 시스템에 들어가 보니, 16년 동안 '제작 PD'이던 직군이 '방송 경영'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나 이제 그럼 김민식 PD가 아닌거야?'

 

나는 누구인가? 김민식? 김민식은 야구선수도 있고, 축구선수도 있고, 가수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김민식 PD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 역시 항진명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참인 정의는 아니었다.  

 

작년 한 해 김재철 사장이 저지른 짓 가운데 가장 황당했던 게, PD 수첩의 이우환 PD를 용인 드라미아 센터로 강제발령한 일이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피디로 평생 살아온 사람에게 세트장 견학 업무를 시키는 것, 딱 김재철 수준이다. 

 

2011/06/08 - [공짜 PD 스쿨] - PD수첩 PD들이, 지금 PD를 못 하는 이유

 

위의 글을 블로그에 쓴 게 딱 1년 전 일이다. 기대된다. 대기발령 후에 나를 어디로 발령낼 지. 아, 발령을 안 낼 수도 있겠구나. 발령을 안 내면 자동 해고니까. 번거럽게 인사위원회에 회부해서 해고할 필요도 없고.

 

'나는 00다'

빈칸을 채워서 항진명제를 만들어 보라. 이 글을 읽는 사람도 이 대목에서 잠시 눈을 감고 고민해 보시기 바란다. '나는 00다'에서 빈 칸에 들어가 항상 참인 말은?

 

 

 

 

 

---잠깐 고민의 시간---                         ^^

 

 

 

 

 

 

 

'나는 누구인가?' 늘 고민하며 산다. 나의 삶은 그 고민의 결과이다. '나는 공대생이다' '나는 영업사원이다' '나는 통역사다' '나는 예능 피디다' '나는 드라마 피디다' 그 무엇도 항진명제는 아니었다.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위의 빈 칸에 들어가 항진명제를 만드는 말은 '죽는'이다.  

 

'나는 죽는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항진명제다. 그리고 이 명제를 가슴에 품고 살면 하루 하루 즐겁게 살 수 있다.

 

9년전, 아끼던 후배가 죽었다. 삼성SDS를 다니며 정말 열심히 일하던 친구였다. 쌓인 피로를 폭탄주로 풀고, 일하느라 건강검진도 소홀한 친구였는데, 어느날 일하다 피로 과다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서 보니 간암 말기였다. 일하느라 결혼도 미룬 후배는 결국 설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혼자 살던 후배는 병원에서 입원도 받아주지 않아 마지막에는 호텔에서 생활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호텔에는 하루에 한 번씩 들여다보는 직원이 있으니까. 호텔에서 생활하는 게 안쓰러워 후배를 집으로 데려와 같이 지냈다. 당시 아내가 미국 유학 중이어서 혼자 살고 있었으니까. 잘 먹이거나 챙겨줄 자신은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내가 딴 건 몰라도, 웃겨줄 자신은 있다.'

 

하지만 후배에게 도움이 된 건 나의 사람 웃기는 재주가 아니라 안마 기술이었다. 암말기 환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 언제인지 아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다.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살이 급속도로 빠진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뼈마디 마디가 배겨온다. 후배의 신음 소리에 눈을 뜨면, 아침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후배의 몸을 주물러줘야 밤새 배긴 근육이 풀렸다.     

 

사람들은 내가 후배를 돌봤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랑 사는 한 달 동안, 후배가 나를 돌봤다. 그 녀석이 일에 빠져 사는 내게 해준 충고가 있다. '형,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요? 그럼 지금 그냥 하세요. 행복은 미루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한 달 후, 후배는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 후, 후배가 던져준 화두를 안고 산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라는 명제를 안고,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한다. 세상을 어떻게 하면 즐길 것인가. 공짜로 즐겨야 제대로 즐긴다. 돈들여 즐기는 것은 자칫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매일, 공짜로 즐기는 세상을 마음껏 누리며 산다.

 

대기발령이 던져준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김민식 피디인가? 이제는 아니다.

나는 MBC 직원인가? 곧 아닐 수도 있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공짜로 즐기는 세상'의 주인이다.

 

 

 

취미 하나 없던 녀석인데, 시한부 판정을 받고 디카에 취미를 들였다. 후배가 찍어준 사진이다. 

항상 즐겁게 사시길.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서명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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