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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오래 살고 싶어졌다

by 김민식pd 2024. 6. 14.

저는 작가님을 편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번 좋아하기 시작한 저자는, 그의 책을 전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제가 편애하는 저자 중에 편성준 작가님이 있어요. MBC애드컴, TBWA/Korea 등의 광고회사에서 2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근무한 분인데요. 광고 카피보다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어 퇴사하셨고요.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등의 책을 출간하며 전업 작가가 되었어요. 

저는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어 퇴사한 사람입니다. MBC에 사표를 쓸 때, 제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어요. 10년 가까이 기록해 온 읽고 싶은 책 목록입니다. 지금도 여기에 수백 권의 책이 있고요. 시간이 날 때마다 한 권씩 찾아 읽어요. 읽고 싶은 책만 있어도 설레는 마음으로 사표를 쓸 수 있어요. ‘이제는 매일 회사 대신 도서관으로 출근할 수 있어!’ 읽고 싶은 책의 리스트가 길어지는 건, 책을 소개하는 책을 즐겨 읽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이 추천하는 책을 보며 다음에 읽을 책을 또 찾아봅니다. 편성준 작가님의 새 책도 재미난 책을 권해주는 책입니다. 

<읽는 기쁨> (편성준 / 몽스북)

‘남들이 꼽는 명작이나 베스트셀러, 다 소용없습니다. 범위가 편파적이더라도 제가 진심으로 좋았던, 그래서 버릴 수 없었던 책만 고르기로 했습니다. 출판사 몽스북에 가서 기획 회의를 하면서 그래도 구색 맞추기로 인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좀 넣을까 하다가 그렇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우, 가뜩이나 글을 재미나게 쓰는 분이, 거룩한 인문고전이나 지루한 벽돌책이 아니라 오로지 ‘읽는 기쁨’을 선사해주는 책을 소개해주시니 이런 책을 만나는 것 또한 책벌레의 행복입니다. 먼저 목차를 보며, 저와의 싱크로율을 살펴 봤어요. 마침 제가 재미나게 읽었던 책들도 나오네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필립 K. 딕 <사기꾼 로봇>, 존 스칼지 <노인의 전쟁>, 켄 리우 <종이동물원>,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한강 <소년이 온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최은영 <씬짜오, 씬짜오> 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스티븐 킹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기욤 뮈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로버트 맥기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51권의 책 중에 12권을 읽었네요. 대학생 시절 영어 공부하느라 원서로 읽었던 스티븐 킹의 소설부터 드라마 피디로 일하며 대본 작법 공부하느라 본 로버트 맥기의 책까지 다양하게 만날 수 있어 반갑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지만,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소개받기도 해요. 정지아 작가님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미나게 읽고 유튜브에서 소개한 적도 있고, 블로그에 올린 적도 있는데요. 소설집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정 작가는 북 토크에서 단편집 <자본주의의 적> 이야기를 하면서 “고양이 이름이 그냥이, 저냥이였는데, 이제라도 좀 자본주의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다음 배는 구글이와 애플이라고 지었다”라고 해서 사람들을 웃겼다. (...)
“X됐다”로 시작하는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일단 너무나 웃긴다. 서울에 사는 문인 동료인 시인이 영화 하는 백 피디를 데려와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 백 피디가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실이 우연히 밝혀지자 그걸 농담의 소재로 사용했던 것이다. 정 작가가 술김에 “어디 감히 고졸이, 문학박사 앞에서!”라고 위악을 떨었고 새벽 다섯 시쯤엔 백 피디도 “죄송합니다. 감히 고졸이 한 말씀드리자면...”하는 식으로 맞장구를 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 자빠질 일은 다음날 일어났다. 동네 입구에 급조한 듯 조잡한 입간판이 세워졌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편성준 작가님의 소개글만 봐도 너무 재미있어서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는데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소설은, 자학 코미디와 허무 개그를 오가며 저를 몇번이나 웃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웃기는 소설은 전철에서 읽으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어요. 조용히 혼자 집에서 읽기를 권합니다.

바로 다음에 찾아 읽은 책은 김언수 작가님의 <뜨거운 피>입니다. 이 대목에 꽂혔거든요.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안타깝고, 피는 뜨겁다. 그래서 그 동네 술자리에선 싸움이 벌어지고 술판이 엎어지는 일이 흔했다. 죄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에, 건달에, 루저 주제에 서로에게 훈장질을 어찌나 해대는지, 사실 술자리가 엎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남자가 점잖게 충고를 한다. “니가 일을 그딴 식으로 처리하니 망조가 드는 거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니 내 말 잘 들어라.” 그러면 앞의 남자가 발끈한다. “너나 잘해라. 이 새끼야. 마누라한테 처맞고 다니는 주제에 어따 대고 훈장질이고.” 그러면 어김없이 술판이 뒤집어지고 소주병이 날아다니고 주먹질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또 술을 마시며 “어제는 미안했다.” “미안은 무슨. 우리가 뭐 남이가.” 이 난리를 치는 동네 말이다.’

다시 편성준 작가님의 영업에 넘어가 책을 펼쳤습니다. 오, <뜨거운 피> 엄청 재미난 소설이네요.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김언수 작가님의 <잽>을 읽고 블로그에 소개한 적도 있어요. 편성준 작가님은 광고 문구를 쓰던 카피라이터답게 책 영업 글도 맛깔나게 쓰십니다. 안 읽고는 못 배겨요.



‘나는 책에 금서니 필독서니 하는 라벨을 붙이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행태라고 생각한다. 멀쩡한 책도 시험에 나온다고 하면 읽기 싫어지는 법인데 필독서라는 이름이 붙으면 얼마나 매력이 떨어지겠는가.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는 “아이들에게 특정 서적에 대한 끝없는 증오를 심어주고 싶다면 그 책을 필독서에 배정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아무리 책이 재미있어도 아이들에게 책 읽으라는 이야기는 잔소리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리 강의를 열심히 해도 강제로 동원된 전교생 강의를 듣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고역이고요. 가장 가르치기 힘든 사람은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입니다. 독서도, 강의도, 자발적 선택이 동기 부여에 있어 가장 중요합니다.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을 인생 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이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읽고 난 뒤부터는 만나는 사람마다 영화를 봤더라도 이 소설을 꼭 읽어보라고 권한다. 물론 내 말을 듣고 고분고분 소설책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좋은 건 좋다고 얘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저도 이 소설, 정말 좋아합니다. 영화로도 여러 번 봤지만, 원작 소설은 영어로만 5번 넘게 읽고요. 영문 오디오북까지 구해서 몇 번이고 다시 감상했어요. 얼마 전 아리랑 시네마 옆에 있는 아리랑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의를 할 때는 제가 쓴 책 <외로움 수업>과 제가 좋아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묶어서 이야기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내를 죽인 살인범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알고 보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 아닐까요? 평생 얼마나 외롭겠어요.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런 그가 어떻게 그 외로움을 견뎌냈을까요?

1. 소소하지만 작은 성취에 집중한다.
듀프레인은 마당에서 주운 돌을 깍고 다듬어서 조각하는 게 취미입니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마음을 가다듬기 쉬워집니다.
2. 자신의 전문지식을 동원해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은행가로 일했던 그는 간수들에게 절세 팁을 알려주고 재무상담을 해줍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를 동원해 남을 도울 방법을 찾는 거죠.
3.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가꾼다.
그렇게 해서 간수들의 마음을 얻은 듀프레인은 교도소 도서실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요. 정치인들에게 도서 기증이나 예산 증액을 부탁하는 편지를 쓰며, 재소자들이 책을 읽고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공간을 만듭니다.

비록 살인누명을 쓴 사람에게 비할 수는 없겠지만, 만만치 않게 외로운 게 은퇴자들입니다. 비록 감옥에 비할 수는 없지만, 노년기는 우리에게 자유를 뺏아가고 조금씩 활동의 제약과 구속이 늘어갑니다. 노후에는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작은 기쁨을 수집해야 합니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찾고,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봉사 활동을 찾고,
자신이 함께 꾸미고 싶은 공동체를 찾는 겁니다.

외로울 때, 저는 책을 읽습니다. 기왕이면 재미난 책을 읽습니다. 편성준 작가님의 <읽는 기쁨>을 통해 다시 한번 세상에는 읽고 싶은 책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일단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또 늘어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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