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나이를 먹는 게 참 싫었습니다.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웠습니다. 1980년대 제 주위에는 재미나게 사는 어른이 별로 없었어요. 아, 나이 들어가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그냥저냥 살아야하나보다 싶었어요. 그런 제가 요즘 나이 쉰다섯에 인생이 이렇게 재미날 줄 몰랐어요. 책을 읽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공감한 구절이 있어요.
‘과거에 선배나 어르신들이 “너도 늙어 봐라”라는 말을 하셨다. 그 말이 “나이 들고 늙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서러운지, 고독하고 억울하고 불안하고 막막한지 너희도 겪어 봐라”라는 저주의 말로 들렸다. 그러나 요즘 내가 듣는 선배들이나 어르신들의 “너도 늙어 봐라”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르다. 나이 들어 보니 생각보다 근사하다, 즐겁다, 뜻밖에 재미있다,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와 보람을 느끼니 당신들도 그 세계로 들어와 보라는 초대의 말로 들린다.’
1982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해 30년 넘게 언론인으로 일하고, 2015년 경향신문 70년 역사상 최초로 정년 퇴임한 여기자가 된 유인경 작가님의 새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오십 너머에도 천 개의 태양이 빛나고 있지> (유인경 / 테라코타)
50대 이후의 삶은요,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보는 시간’입니다. 부모나 가족의 요구나 기대 때문에 혹은 사회적 역할 때문에 자신의 재능과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살아왔던 시기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오십 이후입니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달로 우리는 수명 연장과 함께 기나긴 ‘노년’을 선물(?) 받았습니다. 재력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50대 이후에는 체력과 지력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남아 있는 50여 년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즐겁게 사는 멋진 어른도 많아요. 똑같이 나이를 먹어도 어떤 이는 노쇠한 노인이 되고 어떤 이는 진정한 어른이 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동안 만나 본 사람들 가운데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저자는 “행복한 이들은 대부분 오늘, 지금의 이야기를 한다”고 답했습니다. 화려한 과거, 혹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상처, 아무도 관심 없는 무용담 대신 오늘 만난 사람, 오늘 읽은 책, 오늘 새로 발견한 즐거움에 대해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거죠. 저도 공감합니다.
불행은요, 똑같은 날들이 계속 반복되는 겁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으면 사람은 지겨움을 느끼고 허무에 빠집니다. 행복은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는 게 행복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늘에 집중해야 해요. 오늘 새로 배우는 게 있어야 해요. 저는 매일 새로운 책을 읽고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고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내가 배운 것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받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항상 새로운 일상을 만나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없고요,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어요. 단지 오늘 내가 새로 만나게 될 즐거움에 집중합니다. 독서든, 여행이든, 강연이든.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그랬대요. “21세기에는 직업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 혹은 자신의 취향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도구가 된다”고요. 2020년에 회사를 나올 때, 말리던 이들이 하나같이 한 이야기가 MBC PD라는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도 사라진다고요. 그때 속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나는 ‘노는 인간’으로 살 겁니다. 독서와 여행과 탁구와 줌바 댄스를 하며, 재미있는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고요. 나의 즐거움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어요. 철없는 소리라고 웃어넘길까 봐. 잘 노는 80대 노인이 되는 게 꿈입니다.
나이 80에도 잘 놀려면 나이 60에도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100세 시대에는 60세 정년이 의미가 없어요. 유인경 작가님의 동료는 65세라는 나이에 취업이 어려운 요즘, 신문사에 입사했답니다. 사진기자로 오래 일한 분인데요. 취업의 비결은 오래 일한 경험이랍니다.
“신문사마다 예전에 필름으로 찍었던 사진을 디지털화해서 설명을 달아 보관해야 하는데 젊은 기자들은 그 시대의 상황이나 배경, 그리고 당시 인물들의 이름을 잘 몰라요. TJ(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 HR(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등 인사들의 애칭이나 얼굴도 모르죠. 그래서 늙은 나를 찾더라고요. 우리야 제3공화국 이후 인물들은 거의 기억하니까 그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오네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아무 쓸모 없다고 생각했던 아날로그 능력으로 새 일을 찾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맞아요. 21세기에도 구시대 기술이 먹힐 때가 있어요. 제가 2016년에 영어책 암기라는 방법으로 영어 공부하는 책을 쓰자 누가 그랬어요. “아니, 요즘처럼 조기유학도 많고 어학연수도 쉬운 시절에 누가 그렇게 힘들고 귀찮은 방법으로 영어를 공부하겠어요?”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고 유학이나 연수가 힘들어졌어요. 다시 제 책이 팔리기 시작했어요. 어떤 기술이 어떻게 필요할지 몰라요.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세상과 나누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이 최고선이고 무엇이 좋은 삶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답니다.
“최고선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것이다. 다이몬 Daimon이라고 부른 각자의 고유한 능력은 우리 모두 갖고 태어났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그 고유한 능력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저는 50 이후야말로 잠재력을 실현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부담이 적거든요. 저는 더이상 일에 욕심을 내지 않아요. 무리하지도 않고요. 드라마 피디로서 일할 때, 성과가 나지 않으면 작가, 배우, 제작사, 회사, 다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촬영하고 편집을 했어요. 1인 창작자로 사는 요즘은 부담이 적어요. 망해도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적으니까요.
1920년생인 김형석 교수님은 100세 시대에는 3단계의 인생으로 나눠 살아야 한다고 말하십니다. 30세까지는 나를 키워 가는 자아 교육 단계, 65세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단계, 그리고 그때부터 90세까지는 사회를 위해 일하는 단계라고요.
“다들 나의 건강과 장수 비결을 묻는데 답은 늘 같아요. 항상 공부하고 아직도 일하는 것이 비결이에요. 물론 95세 이후에는 신체가 고달프고 힘들어 참 살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정신적인 내가 신체적으로 늙은 나를 업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정신은 늙지 않아요. 내가 계속 키우고 있거든요.”
미국의 소통이론 전문학자인 폴 스톨츠 박사는 IQ (지능지수)나 EQ(감성지수)보다 AD(Adversity Quotient)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이 성공한다고 했습니다. 실수나 실패에 무너지지 않고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자신이 거둔 열매를 기꺼이 남들과 나누려는 마음을 갖는다면 100세 시대에 전성기는 나이 50 이후에도 언제든지 새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5,60대는 역경지수가 꽤 높은 이들이라 생각합니다.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에 태어나 경제 성장을 일구고, IMF 위기나 외환위기, 코로나 위기 등 매번 다양한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왔으니까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기에는 다들 건강한 상태입니다. 아직 할 일이 조금 더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쪼록 우리가 고난과 시련을 통해 배운 것을 다음 세대와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십 너머에도 천 개의 태양이 빛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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