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불행한 과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by 김민식pd 2024. 5. 13.

SNS에 올라온 작가님들의 소식을 통해 다음에 읽을 책을 찾는 게 저의 독서 습관입니다. 페이스북에서 김응교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이 배웁니다. 선생님이 내신 책 중에 간토대지진을 다룬 책이 있어요. 일본 작가나 시민들이 조선인 학살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였는지를 쓴 책입니다. 한일관계가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가는 이 시대,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궁금한 마음에 책을 주문했어요.

<백년 동안의 증언> (김응교 / 책읽는 고양이>

추천사에서 이만열 선생님은 이렇게 쓰십니다.

‘간토 조선인 학살 100주기가 되는 올해, 이 책은 특히 한국과 일본의 작가와 시민들이 백 년 동안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하고 극복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백년 전 사건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것은 원한을 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돌아가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이신 임헌영 선생님은 좀 더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세계사 최악의 화재 주범은 로마를 불태우고 기독교도를 학살한 네로였다. 먼 로마의 비극에는 분노하면서도 정작 일본 군국 제국주의 극우세력에 의해 네로보다 더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우리 민족을 학살한 참극인 관동대지진 만행을 방관했던 게 역대 친일 정권이었다. 윤동주, 김수영, 신동엽 연구로 정열을 바쳐왔던 김응교 교수의 이 저서는 관동대참극 100주년사의 최고 금자탑이다. 이를 통하여 그때 우리 선조들을 참살했던 일제 파시즘이 되살아난 것이 오늘의 한-미-일 3각 동맹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역사는 진보하여 민족해방 투쟁의 열기가 용솟음쳤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근래 드문 역작이다.’



간토대지진은 지진에 취약한 일본열도에서 일어난 천재지변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일어난 조선인 학살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1. 두려움은 혐오를 만들고, 혐오는 폭력을 만든다.
간토대지진이 일어나기 3년 전에 3.1 운동이 있었고요. 당시 일본 신문은 3.1 운동을 무자비한 폭동으로 보도해서 일본인 사이에 조선인은 무자비한 존재다라며 공포감을 심습니다. 집단의 두려움은 집단의 광기로 변하고, 혐오의 대상을 집중하는 집단 폭력으로 변합니다. 

2. 일본의 노동 시장을 조선인이 빼앗는다는 불안이 넓게 퍼졌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조선인 농민들이 경작지를 잃고요. 이들은 이주 노동자가 되어 일본과 만주로 향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낮은 임금으로도 열심히 일했고요. 조선인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불안이 퍼집니다. 

3. 조선인을 비하하는 ‘후테인센진(불령선인)’이라는 이미지.
후테이센진이란 즐거움 없이 불평 불만을 품고 멋대로 행동하는 조선인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은 뛰어난 민족이고 중국과 조선은 아직 발전하지 못한 미개한 나라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 언론들은 ‘후테이센진을 조심하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요. 이 말은 조선인 학살을 획책하는 선전 선동의 도구가 됩니다. 

4. 계엄령과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는다’는 혐오성 유언비어가 결정적이었다. 
조선인을 적대시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림으로써 일본 당국은 지진으로 인해 정부로 향하는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선인에게로 향하는 불안과 공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국민의 폭력 이전에 국가적 폭력이었어요. (국내의 지지율 저하라는 위기가 닥치면 늘 외부의 적에게 시선을 돌려 내부 결속을 획책하는 사례가 늘 있었지요. 외부와의 갈등과 위기 상황을 조장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려는 이들... 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역사는 늘 다시 되풀이되는 걸까요?)

5. 자경단이라는 훈련된 예비 학살 조직이 있었다. 
계엄령 아래 군대와 경찰은 총출동하여 서민들에게 자경단을 통해 현장을 지키라 하고, 학살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조선인을 학살하는 주체가 일본 국가가 아니라, 대리 학살인 자경단으로 보이게 한 거지요. 자경단 뒤에는 군대 경찰 헌병이 있고요, 그 뒤에는 일본 국가가 있었어요.

지난여름 독일 여행을 하며, 다하우 수용소라든지,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추모 공원을 돌아보며, 독일이 유럽 연합의 지도자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건, 2차 대전 기간 일어난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비슷한 시기에 독일에 필적하는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일본은 왜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을 걸까? 그랬다면 지금쯤 일본은 동북아에서 독일과 같은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이 책을 읽었고요. 깨달았어요.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이 있었어요. 다만 그러한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반영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책을 읽고 간토대지진을 증언해준 일본 작가들과 지식인들에게 경외감을 안게 되었고요. 용기를 갖고 목소리를 내는 양심적인 소수는 어디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희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백년 동안 조선인 학살로 이어진 간토대지진을 끊임없이 삭제하려 했지만, 《백년 동안의 증언》은 의도적인 ‘삭제의 죄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말합니다. 이것만이 같은 비극을 막는 길이며,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백년을 위한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좀 글이 무거웠네요. 저는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 여행을 다니며, 일본에서 나온 책을 즐겨 읽습니다. 일본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싫어하는 대상에서는 배울 수가 없거든요.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역사를 되새겨보며 한일관계의 성숙한 발전을 소망합니다.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휴가 + 재앙 = 모험  (9) 2024.05.31
50너머에도 찬란한 태양이!  (8) 2024.05.27
인생 성취의 8할은 운  (10) 2024.05.06
일보다 삶이 우선이다  (10) 2024.04.26
죽어라 일만 하다 갈 수는 없잖아요?  (12) 2024.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