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에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 대상으로 강의를 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찾아간 곳에서 저는 강연 인생 최대 고비를 맞이했어요. 그날 강의를 마치고, “질문 있으신 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했더니, “없어요. 그냥 가세요.”라는 말이 들려왔어요. 순간 엄청 당황했어요. 애써 웃으며 농담을 걸었어요. “아유, 그러지 말고 편하게 물어봐요. 여러분이 집에 있는 꼰대한테 못 할 이야기도 여기 앞에 서 있는 꼰대한테는 편하게 해도 되니까.” 그랬더니 다른 남학생이 큰 소리로 “굿 바이!”하고 외치더군요. 갑자기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아, 더 시간 지체하지 말고 얼른 집에 가라는 소리구나’, 제게 주어진 시간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그냥 황급히 도망치듯 나왔어요. 누군가 그 상황에서 질문을 했다가는 나중에 욕을 먹을 분위기였어요. “야, 너는 왜 눈치 없이 질문을 해서 수업 시간을 늘린 거야?” 고등학생 아이들과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궁금한 점이 생기면 책을 찾아 읽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사춘기 전문가’이신 정신건강 전문의 김현수 선생님이 쓰신 책이 있어요.
<사춘기 마음을 통역해 드립니다> (김현수 / 미류책방)
뒤표지를 보니 이렇게 나와 있어요.
‘초4 때는 수학을 포기하고
중2 때는 공부를 포기하고
고1 때는 학교를 포기하고
고3 때는 인생을 포기하는
아이들의 속마음을 알아주세요.’
저는 아이들에게 대입 시험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강의를 다닙니다. 나이 스물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가느냐로 인생은 결정 나지 않아요. 저는 공대 자원공학과를 나왔지만, 20대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영어를 공부하면서 인생이 바뀌었거든요. 통역사, 예능 피디,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그런 저의 이야기도 독서와 영어 공부에 매진하라는 잔소리처럼 들렸나 봐요. ‘고3이면 인생을 포기한다’는 글이 마음에 계속 남습니다.
저자가 진료실에서 청소년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외롭다’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은 자신의 편이 없어 외롭고, 친구 사귀기 힘들어서 외롭고, 코로나로 인해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더 외로웠어요. 그동안 부쩍 가까워진 건 스마트폰과 태블릿 같은 디지털 기기지요.
‘요즘 아이들은 일상적으로 집에서 대화할 형제자매가 없고, 부모와의 대화는 어렵고, 함께할 가족이나 친구, 친척이 현저히 줄어든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최고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코로나는 그 외로움을 몇 배 더 가혹한 고통으로 만들었고, 그 비명이 지금 학교 현장이나 지역 사회에서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습니다. 학교 폭력, 은둔형 외톨이, 포기와 무기력, 우울, 자해 및 자살.... 등등.’
김현수 선생님은 사춘기 아이들의 외로움이 가장 중요한 고통이라고 하십니다. 사춘기 우울, 반항, 일탈의 뿌리는 이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 못한 것에서 출발하고요. 그들의 외로움을 어른인 우리가 잘 이해해 주고, 잘 돌봐 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아이들은 학교 성적으로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잘하는 아이들을 제외한 다수의 중학생들이 겪는 내면의 손상이 무척 큽니다. 나는 잘하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잘하는 아이들의 집단에 속하지 못한다는 자괴감은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아픔으로 연결됩니다.
캐롤 드웩은 <성공의 새로운 심리학>(부글북스)이라는 책에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부류는 능력은 타고난 것이고 고정되어 있어 노력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과제가 어려워지면 머리 탓, 능력 탓, 운명 탓, 환경 탓을 하며 과제를 포기합니다. 이런 고착된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발전이 어렵습니다.
반면 또 다른 부류는 능력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노력하면 변화할 수 있고 시도와 실패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과제가 어려워지면 노력을 더 하고 새로운 방법과 비결, 관점을 찾아 과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갑니다. 저는 천만다행으로 책을 읽고 영어를 공부한 덕에 성장형 마인드셋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걸 타인이 알려주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스스로 마음 먹고 동기 부여를 한 사람은 공부하고 성장하는 게 쉬운데요. 타인의 간섭과 지시를 받으며 사는 사람은 스스로 성장하는 즐거움을 맛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간섭하지 않는 부모가 되는 게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나아지는 것, 이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노력의 미덕이지요. 하지만 이 미덕은 칭찬과 격려, 응원 그리고 함께 견디어 주는 마음, 신뢰라는 토양에서 자라나는 꽃입니다. (...) 우리가 살던 시대와 우리 자녀들이 사는 시대 간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대에 배울 수 있게 해주시는 부모님에 대해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배우도록 강요받고, 배울 기회도 너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학업 동기가 빈곤의 탈출이거나 계층 이동이라면 지금은 그런 동기가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자아실현이 중요한 동기입니다. 자신에게 재미있느냐 의미 있느냐가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학생들은 공부가 힘들면 포기하고, 부모와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합니다. 이때 최고의 도피처가 게임 공간입니다. 고통을 피하고 진지한 생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수단이 게임인데요. 신체 활동의 부족 혹은 신체 활동에 대한 자신감의 부족도 게임에 빠져드는 요인입니다. 신체 활동을 꾸준히 유지하도록 권장하고 친구들과 팀 경기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면 이것 또한 게임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여자 아이들의 경우, 게임에 빠져드는 사례는 적지만, 생리적 변화와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안전함에 대한 걱정과 불안 등으로 우울, 불안, 스트레스가 늘어갑니다. 그렇기에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학부모 교육을 가면 아이들에게 ‘ㅊㄱㅊㄱ’을 권합니다. ‘축구’와 ‘친구’. 어려서 공차고 뛰어노는 즐거움, 몸을 쓰고 부딪히며 노는 즐거움을 아는 아이는 커서 사춘기가 와도 에너지를 발산할 도구가 있어요. 여자아이들의 경우, 초등학교 때 사귄 동네 친구는 커서 성적, 외모, 이성 고민이 생길 때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눠주는 소중한 대화 상대가 됩니다. 축구와 친구, 초등학교 시절에 익혀두고 만들면 평생 가는 든든한 자산이 됩니다.
물론 운동도 좋고, 친구도 좋지만, 아이에게 평생 가는 최고의 지원자는 부모입니다. 사춘기 아이들과 잘 지내고 싶은 부모님들께 추천하고 싶은 김현수 저자님의 대화법이 있습니다. 바로 ‘힘그괜’ 대화법입니다.
“힘들지? 힘들지 않니? 힘들었지?”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아이들은 온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아이들이 힘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그랬구나.”하고 맞장구를 쳐주세요. 마음을 이해받은 아이는 편안해집니다.
“괜찮아, 괜찮다, 이제 괜찮다.”
이렇게 아이 마음을 이해한 뒤, 아이를 안심시켜 주고 포용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주세요.
‘힘들지? 그렇구나. 괜찮다.’
자, 이 세 문장 그 어디에서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우리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조언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잔소리가 될 가능성이 커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안아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이의 속마음을 알아주세요.
허세를 부리면 -> 외로워요.
짜증을 내면 -> 도와주세요.
무기력해지면 -> 힘들어요.
냉소적이면 -> 자신이 없어요.
좋은 부모가 되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요. 책을 보며 배울 수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좋은 통역(양육) 지침서를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현수 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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