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SF 소설 매니아입니다. 영어 독해 공부를 위해 찾아 읽던 아이작 아시모프의 과학 소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1996년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에는 PC 통신 나우누리에 아시모프 단편을 번역해서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 재미난 소설, 나 혼자 읽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잖아?’
살다가 재미난 걸 보거나 읽으면 꼭 나누고 싶습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최근에 읽은 SF 소설 중 켄 리우의 두 번째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를 읽었습니다. 휴고상,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40년 만에 동시 수상한 대표작 <종이 동물원>을 재미나게 읽었기에 이번 책도 반가웠어요.
켄 리우는 1976년 중국에서 태어나 열한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하버드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프로그래머로도 일했어요. 그 후 다시 하버드 법학대학원을 나와 변호사로도 7년간 일했고요. 지금은 소설도 쓰고, 법률 컨섵팅도 하며 다양한 일을 합니다. 제가 켄 리우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어떤 친구는 자신은 테드 창을 더 좋아한다고요. 테드 창도 좋지요. 그런데 저는 켄 리우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켄 리우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의 고전과 설화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SF적인 상상력을 덧붙이거든요.
넷플릭스에 올라온 <러브, 데스, 로봇>, 1시즌의 <굿 헌팅>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귀신 사냥꾼인 아버지를 따라 구미호를 사냥하던 주인공이 새끼 여우로 변신하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조금 충격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긴 하지만, 스팀펑크라는 장르의 매력을 잘 살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켄 리우의 원작이고요. 이번 작품집에도 단군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나옵니다.
SF는 참 재미난 장르입니다. 그 안에 다양한 서브 장르가 있어요. 이번 단편집은 마치 종합선물셋트 같아요. 대체역사, 실크펑크, 스팀펑크, 사이버펑크 등 다 나와요. 11편의 소설 중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작품은 <북두>입니다. 일본을 무력으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벌의 야심을 품고 조선을 침공합니다. 파죽지세로 한양과 평양을 함락시킨 왜군이 국경까지 밀고 오고요, 명의 소년 황제 만력제는 이여송 등을 보내 왜군을 막으라고 합니다.
평양성 전투를 대체역사물로 풀어간 작품인데요. 기발한 상상력으로 놀라운 신무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구를 물리친 명나라의 무사가 황제를 알현하며, 자신의 발명품으로 명의 국방력을 더욱 공고히 하라고 황제에게 진언을 올립니다. 그러자 황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약 200년 전 영락 황제 연간에, 제독 정화가 천축 너머의 대양으로 일곱 차례 원정을 떠났다. 인간이 그때껏 만든 가장 거대한 배를 거느리고 천축과 서역, 아주(아프리카), 석란(스리랑카)까지 항해했다. 그러면서 명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원정을 거듭할수록 더욱 더 먼 곳까지 이르렀다. 만약 정화가 항해를 계속했더라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 묵서가(멕시코)와 미리견(아메리카)땅을 발견했을 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나는 서반아 은과 옥수수 고구마 따위가 지금쯤 우리 손에도 들려 있을 것이다.
허나 영락 황제께서 붕어하신 이후, 후계자이신 선덕 황제께서는 대양을 건너는 원정을 일제히 중지시키셨고, 정화의 항해 기록을 모두 불태우셨으며, 거대한 보물선들을 바닷속에 가라앉히시고 다시는 그러한 배를 만들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리셨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콜럼부스가 인도 항로 개척을 위해 떠나기 전에 이미 중국은 대양을 건너는 항해 기술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그 기술을 폐하지요. 식민지 건설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책에서 황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화와 그의 부하들은 항해 도중에 명 제국의 국경 바깥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여럿 발견했다. 향신료와 신기하게 생긴 동물, 아름다운 여인 등이 가득한 땅, 그러나 무기는 거의 발달하지 않은 땅이었지. 명나라 사람이라면 그러한 땅에도 명나라 황제의 덕이 흘러넘쳐야 한다고, 그곳 사람들 또한 공자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문명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고 대뜸 판단했을 것이다. 서로 다투는 원주민들은 도교의 가르침을 얻어 평화를 음미하도록 하고 말이다. 이때 덕이 있는 자가 행할 일은 선단의 여러 보물선에 교역을 위한 물자가 아니라, 불화살로 무장한 병사들을 실어 보내는 것이다.
선덕황제께서는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하리라 생각하셨다. 그래서 유혹을 모조리 없애는 길을 택하신 것이다.”
대체역사 SF 소설을 읽다가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니 반갑네요. 스페인 정복자들의 행태를 이렇게 풀어주시는군요. 쿠바 여행 다니며 제일 안타까웠던 일. 지금 현재 쿠바에는 쿠바 원주민이 거의 없어요. 스페인 정복자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농장 노예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지요. 평화롭게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절멸하게 된 과거의 비극을 생각하면 참...
왜 명나라는 정화의 함대를 불태웠을까요? 중국이 중국답게 결정한 겁니다. 중국, 中國, 그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어요. 동북아에서는 주위에 오랑캐들로 둘러쌓인 유일무이한 강대국이었지요. 수천 년 동안 그렇게 믿고 살았어요. 정화의 항해일지를 살펴보다 문득... 어라, 세상이 되게 넓네? 어쩌면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닐 수도 있겠네? 우리 중국보다 더 큰 나라도 있고, 명나라 황제보다 더 강한 왕이 있을 수도 있겠네? 그냥 모르고 사는 게 편할 수도 있겠는데?
유럽 열강들은 왜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을까요? 산업혁명의 결과 생산물이 엄청나게 늘어났거든요. 내수 시장만으로는 팔 곳이 부족했거든요. 돈이 생긴 신흥 부르주아들의 욕망이 커졌고, 그들은 외국의 귀한 향신료며, 차며, 보석을 다 사들이고 싶어했거든요. 중국의 비단이며 차도 다 탐이 났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교역을 하자고 했는데요. 중국은 팔기는 하지만 유럽의 물자를 살 생각은 없었어요. 중국이라는 나라가 워낙 커서 자급자족만으로도 충분했거든요. “우리 사람 당신네 물건 필요없다해.” “그래? 혹시 아편은 좀 피워보셨을까?”
이야기가 너무 멀리 갔네요.
유혹 중 가장 큰 유혹이 뭔지 아세요? 힘을 가진 사람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유혹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경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타락하게 마련이거든요.
소설 속 황제는 이렇게 말을 매듭짓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언제나 참된 덕을 찾아갈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사람은 유혹에 약하고요. 바른 길을 가려고 해도 어느새 어두운 골목을 헤매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렇지만 켄 리우 작가님이 내신 신작의 유혹에는 바로 넘어갈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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